이춘재 자백 ‘화성 8차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15 10:00
  • 호수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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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옥살이 윤씨 “나는 범인 아니다”
2002년 《시사저널》에 억울함 호소

지난 1988년 9월16일 오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에서 여중생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이며, 7차 사건이 일어난 지 11일 만이다. 피해자는 중학교 1학년인 박아무개양(14). 박양은 전날 밤 가족들과 함께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11시20분쯤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전 7시쯤, 박양의 어머니는 딸이 일어나지 않자 깨우려고 방에 들어갔다. 박양은 이불에 덮인 채 누워 있는 상태였다. 어머니는 딸을 흔들어 깨웠으나 이미 싸늘한 시신이 돼 있었다. 목에는 강하게 눌린 자국(멍)이 있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박양이 성폭행당한 후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보고 수사에 들어갔다. 현장 정밀감식에서 남성의 음모 8개를 찾아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했다. 여기에는 방사성 동위원소 감별법이 동원됐다. 그 결과 음모에서는 보통 사람에게서는 발견되기 어려운 중금속 티타늄(13.7PPM)이 다량 검출됐고, 혈액형은 B형으로 나왔다.

화성 8차 사건 당시 범행 현장(왼쪽)과 범인으로 검거된 윤아무개씨(오른쪽)  ⓒ KBS 뉴스 캡처
화성 8차 사건 당시 범행 현장(왼쪽)과 범인으로 검거된 윤아무개씨(오른쪽) ⓒ KBS 뉴스 캡처
화성 8차 사건 당시 범행 현장(왼쪽)과 범인으로 검거된 윤아무개씨(오른쪽)  ⓒ KBS 뉴스 캡처
화성 8차 사건 당시 범행 현장(왼쪽)과 범인으로 검거된 윤아무개씨(오른쪽) ⓒ KBS 뉴스 캡처

경찰은 범인이 티타늄 취급소에서 일할 것으로 내다봤다. 태안읍 일대의 영구자석 공장, 용접봉 사용 업체, 램프필라멘트 공장 등 32개 업체를 탐문해 종업원 465명 중 혈액형이 B형인 271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이를 다시 48명으로 압축하고 이들에게서 체모를 채취했다.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 농기구수리센터 수리공으로 일하는 윤아무개씨(22)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경찰은 사건 발생 약 10개월 만인 1989년 7월25일 오후 윤씨를 검거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본부로 연행했다. 윤씨는 “나는 범인이 아니다”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사건 당일 알리바이에 대해 “집에서 잠자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거짓 반응’이 나오자 윤씨를 7시간 동안 추궁해 26일 새벽 3시쯤 자백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윤씨는 범행 당일 새벽 1시쯤 박양 집의 담을 넘었다. 당시 박양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윤씨는 방의 문고리를 딴 후 자고 있던 박양의 목을 오른손으로 누르고 왼손으로 입을 막아 실신시켰다. 이어 박양의 옷을 벗겨 성폭행한 후 숨을 거두자 시신을 이불로 덮어놓은 채 도주했다. 경찰은 직접적인 살해 동기에 대해 “소아마비를 앓고 불구가 된 뒤 평소 여자와 교제할 수 없어 성적 욕구를 채우지 못하던 차에 강간할 대상을 찾으러 태안읍 진안리 일대를 배회하다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다만 범행 장소와 수법이 달라 이전의 화성 연쇄살인과는 동일범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1~7차까지의 범행은 모두 논두렁이나 야산 등 야외에서 일어났고, 피해자의 소지품(스타킹, 속옷 등)이 결박이나 살해 도구로 이용됐다. 반면 8차 사건은 집 안에서 일어났고, 시신은 결박되지 않은 상태였다. 경찰은 이런 근거를 들어 8차 사건은 ‘모방 범죄’로 결론을 내렸다. 강간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된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여기에 불복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이유로 항소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윤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과 같은 판단을 했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윤씨는 무기수가 된다.

 

실체적 진실 접근에 한계

그는 이후 줄곧 “나는 억울한 누명을 썼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2002년 5월 시사저널과 가진 옥중 인터뷰에서도 “나는 살인한 적도 없고, 박양을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수사 과정에서의 가혹행위에 대한 질문에는 “물론 맞았다. 이미 지나간 일을 구구절절 묘사하기는 싫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또 재판에서 패소한 이유는 “나처럼 돈도 없고 빽도 없는 놈이 어디다 하소연하나. 그때 나는 국선 변호인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인터뷰 기사는 살인자의 변명으로 치부돼 여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윤씨는 이후 20년으로 감형돼 2010년 5월 출소했고, 충북 청주에 정착했다. 사건은 이렇게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최근 화성 사건의 용의자로 이춘재가 특정되고 그가 자백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특히 8차 사건까지 “내가 했다”고 털어놓으면서 당시 사건이 논란의 한가운데 섰다.

당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에는 의문점이 적지 않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방사성 동위원소 감별법’은 지금은 쓰이지 않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기법이다. 여러 전문가들도 이 방법은 정확도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범인을 좁혀가는 데는 유용한 방법이지만, 특정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다.

윤씨는 3살 때 왼쪽 발에 소아마비를 앓은 후 다리를 절었다. 당시 방송화면을 보면 윤씨가 심하게 다리를 저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박양의 집은 족히 1m가 넘는 콘크리트 담장이 쳐져 있었다. 윤씨가 침입도 어렵고 도주도 어려운 곳을 왜 범행 장소로 선택했는지 의문이다. 당시 박양의 집에는 부모가 옆방에서 자고 있었다. 박양이 ‘악’ 소리를 지르거나 몸싸움이 있었다면 그만큼 발각될 확률도 높았다. 신체적인 한계에도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범행에 나섰다는 게 의아하다. 만약 윤씨가 경찰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만들어진 범인이라면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셈이 된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8차 사건과 관련한 증거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행 공공기록물 관리법에 의해 일반 사건 서류의 보존기간은 최장 20년이다. 당시 증거물을 현재의 과학수사 기법으로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윤씨 측은 변호사를 선임해 재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물증을 통한 검증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얼마만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화성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강압수사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용의자로 몰려 조사를 받은 사람만 무려 3000여 명이다. 이 중 4명은 조사를 받은 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1988년 조사를 받던 명아무개군(16)은 경찰에 폭행당해 뇌사상태에 빠졌고 이후 숨졌다. 1990년 화성 사건 용의자로 조사를 받다 풀려난 차아무개씨(38)는 수차례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이후 “나는 억울하다. 나를 죽이려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맨발로 동네를 뛰어다니는 등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다. 결국 달리는 열차에 뛰어들어 사망했다.

1993년 7월 용의자로 체포된 김아무개씨(41)의 경우는 황당하다. 앞서 한 재미교포 심령술사(47)는 “꿈속에서 김씨의 이름이 적힌 편지를 받았다”고 경찰에 제보했다. 경찰은 이 말을 듣고 김씨를 경찰서로 연행해 고문과 가혹행위로 6개월간 조사한 뒤 무혐의 처리했다. 김씨는 이로 인해 직장을 그만뒀고 고문 후유증 등을 호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9차 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윤아무개군(19)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혈액형이 용의자와 같은 B형이며 성추행으로 적발된 점과 화성에 거주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범인으로 체포했다. 윤군은 고문과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거짓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현장 검증에서 돌연 범행을 부인했고, 검찰 조사에서 강압에 의한 자백으로 드러났다. 윤군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지내다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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