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의 페친 물갈이 몰고온 ‘조국 大戰’”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21 15:00
  • 호수 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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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의 시시비비] SNS에서의 ‘조국 대전’이 남긴 상처

“당신과 자손 대대로 저주 내리도록 빌 거야.” “역겨운 박쥐. 자 이제 어디로 둥지를 옮기실래나.”

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퇴한 직후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수백 개의 비난 댓글 가운데 일부다. 지난달 조국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 “조 후보자가 임명되면 우리 사회 공정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금 의원이었다. 조국 임명 이후의 상황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여당 내에서 눈치 보지 않고 소신 발언을 한 몇 안 되는 의원으로 그를 꼽았지만, ‘조국 수호’를 외쳤던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역적 같은 존재로 내몰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뜨겁게 만들었던 ‘조국 사태’ 기간 동안 SNS 또한 후끈 달아올랐다. 모든 곳이 달아올랐는데 SNS만 예외일 수 없겠지만, SNS 공간은 더 나아가 진영 간 대결의 주전장(主戰場)이 되는 모습이었다. “단군 이래 최대의 페친(페이스북 친구) 물갈이가 진행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국에 대한 의견 차이로 SNS에서의 친구관계를 끊거나 아예 차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조국에 대해 나와 의견이 다르면 그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껴 아예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어버린 것이다.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찬성과 반대 양쪽에서, 하지만 정반대의 이유로 나오던 말이었다. 두 달여 동안 지속된 조국 이슈가 그만큼 뜨거웠나 보다 하고 넘길 일만은 아니다. 아무리 조국 이슈가 뜨거웠던들, SNS 공간에서 인간관계까지 좌지우지할 정도까지 치달은 과열 현상은 우리가 SNS를 하는 의미와 관련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10월14일 사의를 표명한 조국 법무부 장관이 경기도 정부과천청사를 나서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10월14일 사의를 표명한 조국 법무부 장관이 경기도 정부과천청사를 나서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소통 아닌 ‘불통’의 장이 되어 버린 SNS

한국 사회에서 SNS 공간은 당초 기대되었던 소통과 공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이 이번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다시 한번 드러났다. SNS가 소통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참여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모두의 의견이 같으면 소통 자체가 필요 없다. 그냥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결의대회를 하면 된다. 그런데도 굳이 SNS를 하면서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친구 끊기와 차단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니 앞으로 아예 상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몇 년씩 유지되어 왔던 친구관계가 조국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만다. 대신 같은 사람들하고만 어울린다. 세상 사람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은 정신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는 태도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더 피곤한 것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두고 보지 못해 댓글로 ‘조리돌림’을 하는 광경이다. 예의를 갖춘 이성적인 댓글 토론이야 누가 뭐라 하겠나. 자기의 의견과 다른 글을 올린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으로부터 시작해 온갖 모욕과 조롱의 언어들이 폭탄처럼 쏟아진다. 이곳저곳 다니며 그런 일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전투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은 막아버리겠다는 무서운 결기마저 느껴진다. 사실 나와 다른 의견은 내 생각을 한번쯤 객관화해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잘만 하면 내 생각을 성찰하며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확고 불변한 정치적 신념은 그럴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정치에 죽기 살기로 목을 매는 것일까. 평소 온순하던 사람도 SNS에서 정치 얘기를 할 때면 전혀 다른 거친 사람이 되고 만다. 정치가 잘되는 것이 중요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맺고 끊고 하는 제1의 척도가 될 정도로 인간사에서 정치가 가장 중대한 일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서로를 판단하는 데는 ‘조국이냐 아니냐’하는 것 말고도 더 중요한 많은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말로는 ‘사람이 먼저’라고 하면서, 실상은 ‘정치가 먼저’였다. 누구는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의와 불의의 문제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의의 내용조차도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역지사지의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져야 할 공존의 미덕이다.

페이스북에서는 조국 피로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너도나도 하루 종일 조국을 말했다. 그러면서 SNS 공간은 서로의 주장이 부딪히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진영 대결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지난 두 달여가 넘도록 페이스북에서, 트위터에서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애당초 조 전 장관의 문제는 진영에 따라 갈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들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었다. 조 전 장관의 언행불일치, 불공정과 특혜의 문제, 표창장과 사모펀드를 둘러싼 위법성 여부, 검찰의 수사 양태에 대한 평가, 검찰 개혁의 문제 등 많은 사안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을 굳이 흑과 백으로 나누어 진영 대결로 만들어가려는 진영 내 ‘스피커’들의 역할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야 말았다.

 

중도층 등 돌리게 만든 ‘진영 대결’ 부추김

‘조국 대전’에서 한쪽 진영의 선봉에 섰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진영 논리가 왜 나쁘냐”면서 “’진영 논리가 나쁘니까 빠지지 마라’라고 말하는 자체가 진영 논리”라는 이상한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타오르던 진영 대결의 불에 기름을 끼얹곤 했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진영을 선택해 생각을 주장하면 된다”며 진영 대결을 선동하던 그 목소리는 조국 대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진영 대결을 노골적으로 부추겼던 이런 말들은 어느 진영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중도층의 반감을 자극해 그들을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조 전 장관이 결국 사퇴 결심을 했던 데는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중도보수층의 이반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데 큰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진영의 깃발을 나부낄수록 오히려 중도층은 등을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이 아닌 활동적 삶을 우리에게 주문했다. 그녀가 말한 활동적 삶은 다름 아닌 정치적 삶이었다. 정치적 삶을 통해 정치적인 것의 부활을 가져오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고 아렌트는 강조했다. SNS를 통해 ‘대전(大戰)’을 치른 사람들도 정치적 삶을 살려 했던 것일 게다. 그러나 아렌트가 부활시켜야 한다고 말한 정치의 요체는 다원적 인간들 사이에서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의사소통 행위였다. 그와는 달리, 조국 사태에서 우리가 목도했던 SNS 공간의 모습은 다양성에 대한 부정이 압도하는 곳이었다. 그것은 아렌트가 기대했던 정치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조국 사태는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조 전 장관은 사퇴했지만 우리 마음에 남겨진 상흔이 너무 깊다. SNS에서 드러났듯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상종도 않겠다는 모습들로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았다. 3년 전 함께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끼리도 말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까지 돼 버린 것일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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