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입수] 정두언 미공개 자서전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9.10.29 13:00
  • 호수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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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세상 빛 보지 못한 ‘인간 정두언’ 이야기
A4용지 105장 분량 초고 3회 걸쳐 보도

“정두언이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100일이 지났다. 그럼에도 정 전 의원의 이름과 그가 했던 말들은 여전히 세간에 회자된다. 금방이라도 나타나 복잡한 현 시국을 명쾌하게 진단하고 해법을 내놓을 것만 같다. 정 전 의원은 생전에 늘 뻔하지 않고 뭔가 기대하게 만들었다. ‘정치 풍운아’ ‘촌철살인 논객’ 정두언의 성공과 실패 뒤엔 ‘인간’ 정두언의 꿈과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고 우리 곁에 없다. 

시사저널은 정 전 의원이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기록한 미공개 자서전 초고를 단독 입수했다. 정 전 의원이 2017년 펴낸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시간》의 후속작으로 준비했던 내용이다. A4용지 105장 분량에 달한다. 미공개 자서전 초고에서 정 전 의원은 학창 시절부터 공직 생활, 그리고 정치 입문 후 느낀 점들을 일기처럼 솔직하게 풀어냈다. 인연을 맺은 정치인들에 대한 ‘정두언식 인물평’도 흥미롭다. 초고에는 야망과 자책, 분노와 갈등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인간 정두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정 전 의원은 자서전 초고 첫머리에 “어느 실패한 정치인의 이야기를 고백해 보겠다”고 적었다. 글 내용을 판단했을 때 정 전 의원은 2013년쯤부터조금씩 자서전을 준비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시사저널은 정 전 의원의 미공개 자서전 초고가 역사적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보고 3회에 걸쳐 요약 보도한다. 주요 키워드별로 내용을 묶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우울증, 정치와 함께 찾아온 불청객 

우울증은 정 전 의원이 정치 입문 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힌 불청객이다. 자서전 초고에서 정 전 의원은 처음 우울증을 앓게 된 정황을 털어놨다. 그는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불과 두 달여 앞두고 정계에 입문했다. 기대와 불안 속에서 19년 가까운 공직 생활을 접었다. 결과는 낙선. 한나라당 서울 서대문을 후보로 나섰다가 현역인 장재식 민주당 의원에게 패배했다. 촉박한 시간, 준비·조직 부족 등 총체적 난국 속에서 나름대로 선전했으나, 막상 떨어지고 나니 그 충격이 만만치 않았다고 정 전 의원은 회상했다. 

정 전 의원은 “선거 다음 날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는데 퍼뜩 드는 생각이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였다. 하루아침에 좋은 직장 잃고, (공무원) 퇴직금 날리고 패가망신한 것”이라며“주위에선 2800표 차로 낙선해 신인치고는 (한나라당) 취약지역에서 선전했다고 격려와 위로들을 했지만, 내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낙선 직후 아무 데도 갈 곳 없던 정 전 의원은 집에 틀어박혔다. 정 전 의원은 “도무지 창피해서 밖에 나다니기가 싫었다. 집에서 빈둥대며 소주나 마시고 지내다 보니 점차 폐인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면서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잠도 제대로 못 자니 우울증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이어 “세상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질병이 우울증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참을 수 있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는 것은 심한 우울증을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하는 말”이라며 “당시는 암에 걸려서 죽는 사람과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정말 창피한 얘기인데, 그때 내가 그럴 정도로 몹시 허약했던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드세고 억센 어머니 밑에서 마마보이과로 살아온 데다 20년 가까이 편하고 안정된 직장에서 비교적 사회적으로 대우만 받으며 살아오다 보니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덧붙였다. 

정 전 의원은 2016년 20대 총선 낙선으로 4선 도전에 실패한 뒤에도 극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한 차례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던 사실도 뒤늦게 고백한 바 있다. 정 전 의원은 적극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고 많이 나아진 것으로 알려졌었다. 활발히 카메라 앞에 서고 사람들과 만나고 일식집을 운영하는 등 누구도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했지만 홀연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갔다. 

7월17일 정두언 전 의원 빈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낸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7월17일 정두언 전 의원 빈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낸 근조화환이 놓여 있다. ⓒ 연합뉴스

“‘리스크 테이킹’ 기질 타고났다” 

경기고·서울대 상대 졸업,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 생활, 정계 입문 등 대한민국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정 전 의원은 ‘금수저’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울 출생인 그는 어릴 적 집이 너무 가난해 광주 외삼촌 집에 양자로 보내졌다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다. 집안 살림은 여전히 쪼들렸다. 부모님의 불화도 심했다. 큰아버지뻘 되는 정성태 전 국회부의장이 정 전 의원 집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줬지만, 흔히 말하는 ‘친척 찬스’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정 전 의원은 삶의 궤적을 반추하며 “훗날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기질상 리스크 테이킹(위험을 무릅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특성을 타고난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무슨 일이든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고 후회하자’ 주의였다”며 “여기에는 타고난 기질 외에 내게는 돈과 권력 그리고 잘나가는 부모 등 소위 믿을 만한 ‘빽’이 하나도 없다는 현실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잃을 것도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공직자로서 발걸음을 갓 떼기도 전에 정 전 의원의 리스크 테이킹은 시작됐다. 당시 정 전 의원을 비롯해 새로 임용된 사무관들 사이에서 정무2장관실은 선호도가 높은 곳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에 이은 권력 2인자 노태우 장관 시절이었다. 정 전 의원은 별로 좋지 않은 종합평가 성적에 병역 미필자로 군 가산점을 받지 못했는데도 정무2장관실에 배치됐다. 그는 “선호도가 높고 경쟁은 많은데 단 한 명만 뽑다 보니 너무 리스크가 큰 나머지 결국은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다”면서 “결과적으로 리스크 테이킹 작전에 성공한 셈”이라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의 거침없는 도전 의식은 이후 정계 입문과 민주당 텃밭인 서울 서대문을 출사표, 이명박 사단 합류와 대립 등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정두언 전 의원이 2013년 11월23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며 취재진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정두언 전 의원이 2013년 11월23일 오전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며 취재진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달아” 

정 전 의원은 “나는 세상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고, 심지어는 초등학생 때 대학생과 싸움을 하기도 했다. 너무 기가 셌다고나 할까”라면서 “특히 경찰이든, 학교 수위아저씨든 소위 완장을 찬 사람들이 권세를 부리는 듯한 언행을 하면 절대 참지 못하고 대들고 싸우느라 주변 사람들까지 늘 애를 먹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육군 사병으로 강원도 양구에서 보낸 군 시절은 모난 그의 성품을 조금 깎아놨다. 정 전 의원은 “나도 군대에 가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군대 문화에 순응해야 했다. 무지막지한 군대 문화 속에서 살아가려면 때에 따라서는 자존심도 내던져야 하고, 부조리나 불합리한 일과도 적당히 타협해야 했다”며 “만약 강원도 양구에서 그런 인생의 밑바닥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 후 나는 공직 생활을 하면서 나의 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저지르거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쳐 일찍이 인생의 실패를 맛보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여기서 끝나면 ‘풍운아’의 삶이 아닐 것이다. 정 전 의원은 “(전역) 30여 년이 지난 후 이명박 정부에서 어느새 다시 살아난 기를 억누르지 못하다가 결국 모진 꼴을 당하게 된다”면서 “세월이 흐르며, 또 소위 세상적으로 ‘잘나가면서’ 어느덧 과거의 경험과 교훈을 잊고는 결국 자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내 생각의 시계추는 6시쯤” 

유튜브 시사저널 TV ‘정두언의 시사끝짱’ 등 방송에서 논객으로 맹활약했던 정 전 의원은 균형 잡힌 시각과 통찰력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이었으나 “변하는 현실에 맞게 보수도 변해야 한다”며 구태의연한 시각을 경계했다. 정 전 의원은 자서전 초고에서 “내 생각의 시계추가 지금은 대강 6시(중간)쯤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지 않나 싶다”며 “나름대로는 균형 잡힌 사고를 갖기까지 적지 않은 방황을 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방황’과 관련해 정 전 의원은 공무원 시절 좌파 사상에 심취한 적이 있었노라고 털어놨다. 정 전 의원은 “나는 우리 시대의 대학생들이 흔히 겪었던 ‘의식화’ 교육과 과정을 뒤늦게, 그것도 공무원이 되어서 겪었다”며 정부청사 인근 주점에서 한 운동권 여성과 한동안 소통한 경험을 전했다. 그 여성은 정 전 의원에게 님 웨일스의 《아리랑》,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 등 책을 건네는가 하면 진보 서적의 보급로 역할을 한 ‘논장서적’으로, 민족문화 스터디 모임으로 이끌기도 했다. 자신이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찍힌 것이었다고 정 전 의원은 설명했다. 정 전 의원은 “뒤늦게 의식화 세례를 받은 나는 사회와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 ‘좌경화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 전까지 생각의 시계추가 3시(오른쪽) 방향에 가 있었다면, 그때 이후로 갑자기 9시(왼쪽) 방향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식화 세례를 받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무척 소중하고도 아름다웠던 때로 기억된다”며 “그때 그 여성이 없었으면 나는 아직도 세상을 3시 방향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수구꼴통’으로 살고 있을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야외에 앉아 글을 쓰는 정두언 전 의원 ⓒ 정두언 전 의원 네이버 블로그
야외에 앉아 글을 쓰는 정두언 전 의원 ⓒ 정두언 전 의원 네이버 블로그

“출세주의자이고 기회주의자라는 자책감” 

당당하고 호쾌했던 정 전 의원은 젊은 시절 출세 가도만 바라보다 민주화에 무임승차했다는 데 대해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 전 의원은 “대학생 때 나는 운동권 학생으로 빠지기에는 놀기에 너무 바빴고,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날 용기도 없었던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고 자평했다. 이어 “학교 도서관과 신림동 고시촌 등을 전전하며 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는 출세주의자요 기회주의자’라는 자책감에서 늘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내가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 몸을 던져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공직 생활 내내 내게 커다란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었다. 그 극악무도했던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대신 나는 그 시간을 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했고, 수많은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민주화된 사회의 혜택을 나는 지금 거저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라며 “그 마음의 부채는 공직 생활을 마치고 정치를 하게 되면서도 나 자신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애증의 이름 ‘이회창’ 

정두언 전 의원의 자서전 초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치인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아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였다. 정 전 의원에게 이 전 총재는 고마움과 서운함, 안타까움 등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는 상대다. 정 전 의원은 이 전 총재와의 만남이 공무원에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밝혔다. 이 전 총재와 정 전 의원의 인연은 16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더 오래됐다. 정 전 의원은 “이 전 총재가 신한국당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대권주자로서 자리매김을 시작할 무렵 당시 에너지경제연구원장으로 있던 이 전 총재 친동생 이회성 박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며 “그가 내게 친형(이 전 총재)이 대권을 목표로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니 좀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당시 나는 일개 서기관급 공무원이었는데, 그런 부탁을 받는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대권 경쟁이라는 큰 싸움판에 주변에서나마 관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면서 “그렇게 이회성 박사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팀을 꾸려 대선 준비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후 공무원으로서 불투명한 미래를 놓고 고민하던 정 전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 전 총재(당시 총재)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얼마 후 정 전 의원과 만나 진로 고민을 들은 이 전 총재는 “이번이 좋은 기회이니 한번 해보라”며 격려하고 출마를 승낙한다. ‘어느 지역구를 생각하고 있느냐’는 이 전 총재 질문에 정 전 의원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서대문을에서 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 전 총재는 ‘KT(이기택 전 의원의 약칭)가 자기 지분이라고 주장하는 지역구이니, KT에게 부탁해 공천을 받으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정 전 의원은 회상했다. 당의 수장으로서 공천 갈등을 회피하는 이 전 총재에게 실망한 정 전 의원은 출마 포기 의사를 밝혔다. 이렇게 정치의 꿈이 물거품이 되나 싶던 2000년 1월 한나라당에서 이기택·김윤환 등 지분을 주장하던 소위 ‘구시대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이 전 총재는 아무도 공천 신청을 하지 않는 서대문을에 정 전 의원을 내보내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받아들인 정 전 의원은 정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야심 차게 도전한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실의에 빠져 있던 정 전 의원은 이 전 총재에게 다시 면담 신청을 했다. 다시 만난 이 전 총재에게 정 전 의원은 “총재님, 저는 지금 일이 필요합니다. 보수도 필요 없으니 제게 일을 시켜주십시오. 뭐든 시켜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이 전 총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 전 의원은 “나는 처음에 왜 이러시는가 싶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서 있었다”면서 “그제야 그게 ‘알았으니 나가보라’는 의사표시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무 허탈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그래도 전도양양했던 한 젊은이가 도전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채 찾아와 도움을 청하면 하다못해 덕담이라도 해서 돌려보내면 누가 뭐라고 하나. 이를테면 ‘패배는 병가지상사다. 아직 젊으니 힘을 내라. 무슨 기회가 있는지 고민해 보겠다’는 정도의 얘기만 해 줬어도 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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