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00년] 런던의 중심에서 한국영화를 외치다
  • 런던=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4 14: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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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아시아영화제가 한국 영화 100주년을 주목한 이유

런던 여행을 계획하는 뮤지컬 마니아라면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웨스트엔드를 놓치기 힘들 것이다. 웨스트엔드의 심장부인 레스터 스퀘어에서는 세계적인 뮤지컬 작품들이 간판을 걸고 관객을 유혹한다. 이곳은 런던 영화 산업의 1번지로도 불린다. 영국의 자부심인 《007》 시리즈를 비롯, 규모가 큰 신작 영화 프리미어가 레스터 스퀘어에 위치한 ‘오데온 레스터 스퀘어(Odeon Leicester Square)’에서 자주 열린다.

10월24일, ‘오데온 레스터 스퀘어’ 전면에 조정석과 윤아의 얼굴이 거대하게 걸렸다. 올여름 900만 한국 관객들에게 ‘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 SOS 구호를 명확하게 알려준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가 제4회 ‘런던아시아영화제(LEAFF)’ 개막작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조정석의 유머 코드는 런던에서도 통했다. 위기 상황 앞에서 기발한 기지를 발휘하는 주인공들에게 8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는 분위기였다.

제4회 런던아시아영화제(LEAFF)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엑시트》 ⓒLEAFF 제공
제4회 런던아시아영화제(LEAFF)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엑시트》 ⓒLEAFF 제공

위기의 시대에 찾아온 《엑시트》

런던아시아영화제가 올해 개막작으로 《엑시트》를 선정한 배경에는 한·일 간 반목, 홍콩 시위, 영국의 브렉시트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잡음들이 자리하고 있다. 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전혜정 집행위원장은 “위기 상황을 잘 남겨보자는 긍정의 메시지를 《엑시트》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영화제 기간에 브렉시트 시행일이 내년 1월31일로 3개월 연기됐다는 결정이 발표됐는데, 영국 현지에서 느끼는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인들의 관심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영국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것은 위기일까, 기회일까. 

11월3일까지 열리는 이번 영화제에는 총 60편의 아시아 영화가 런던 시내 주요 극장에서 상영된다. 올해 단연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류준열과 정해인이다. 류준열이 《돈》과 《봉오동 전투》를, 정해인이 《유열의 음악앨범》을 들고 런던 관객을 만난다는 소식에 해당 영화들의 표는 일찌감치 ‘솔드 아웃’을 찍었다.

이날 개막식에는 류준열이 라이징 스타상 수상자로 참석했고, 그런 류준열을 보기 위해 많은 팬들이 몰렸다. 류준열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카메라와 환호 소리가 현장음 역할을 했다. 류준열은 개막식 전날 손흥민 선수가 멀티골을 넣은 ‘토트넘과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3차전을 직관하기도 했는데, 여러모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올해 한국영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은 단연 봉준호의 《기생충》이다.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그 기세를 몰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유력 후보로도 떠오른 상태다. 봉준호 감독이 상업영화 파트에서 한국영화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면, 독립영화 파트에서 한국영화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건 《벌새》다. 정식 개봉도 하기 전에 전 세계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쓸어담으며 한국영화의 저력을 과시했고, 지금도 세계 각지의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사랑받는 중이다.

《벌새》는 신예 배우 박지후를 대중에게 가깝게 소개한 영화이기도 하다. 카메라 각도에 따라 다른 인상을 풍기는 얼굴이 매력적인 이 배우는 한국영화의 밝은 미래다. ‘런던아시아영화제’는 그런 박지후에게 신인배우상을 안기며 앞길을 응원했다.

 

프로듀서 한재덕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영화 《신세계》 《무뢰한》 《아수라》 《돈》 등을 만든 사나이픽쳐스 한재덕 대표는 올해 처음으로 신설된 ‘베스트 프로듀서상’을 수상해 눈길을 끌었다. 숨은 ‘무뢰한당원’이기도 한 기자는 이번 영화제에서 《무뢰한》이 특별 상영된다는 소식에 살짝 고무됐는데, 개막식 다음 날 런던 소호 중심에 있는 ‘더 소호 호텔(The Soho Hotel)’에서는 영화 상영 후 한재덕 대표의 GV도 열렸다. 이틀 연속 템스강에 앉아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졌다는 한재덕 대표는 피로할 법도 한데 호방한 호연지기를 잃지 않았다. 시원시원한 입담과 훈훈한 분위기에 GV는 당초 예정된 시간보다 길게 이어졌다.

베스트 프로듀서상을 수상한 한재덕 사나이픽쳐스 대표의 '관객과의 대화'. 한재덕 대표는 한국에서 손수 챙겨온 《무뢰한》 OST를 질문자들에게 선물하며 영화에 대한 지지에 고마움을 표했다. ⓒLEAFF 제공
베스트 프로듀서상을 수상한 한재덕 사나이픽쳐스 대표의 '관객과의 대화'. 한재덕 대표는 한국에서 손수 챙겨온 《무뢰한》 OST를 질문자들에게 선물하며 영화에 대한 지지에 고마움을 표했다. ⓒLEAFF 제공

한재덕 대표는 《무뢰한》을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꼽은 이유에 대해 “너무 사랑해서 아픈 손가락”이라며 “영화제 측으로부터 제작한 작품을 하나 선정해 달라고 했을 때 바로 《무뢰한》을 떠올렸다”고 애정을 밝혔다. 《무뢰한》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남긴 작품. 그럼에도 열혈 마니아들을 양산하며 긴 생명력을 부여받았다. 이를 증명하듯 이날 GV 현장에는 무뢰한당원으로 보이는 관객들이 몇몇 포착되기도 했다. 한재덕 대표는 한국에서 손수 챙겨온 《무뢰한》 OST를 질문자들에게 선물하며 영화에 대한 지지에 고마움을 표했다.

한재덕 대표는 영화를 하면서 떨리는 순간이 언제인가를 묻는 질문에 영화를 연애에 비교했다. 그는 “프리 프로덕션을 길게 끝내고 배우들의 첫 연기를 보는 순간, 사랑했던 상상 속의 연인이 내 손을 잡아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며 “최민식의 첫 테이크, 전도연의 첫 테이크, 황정민의 첫 테이크를 보는 순간의 감흥은 평생 잊지 못할 내 안의 추억”이라고 말했다.

 

한국영화 100년, 다시 앞으로 전진

100년 전 10월27일. 서울 종로 단성사 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가 상영됐다. 10월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다양한 기관에서 행사들이 열리고 있는 이유다. 많은 단체들이 생일날에 맞춰 행사를 기획한 것과 달리, 전혜정 위원장은 ‘K-CINEMA 100’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지난 3월부터 런던 시내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전 위원장은 여러 가지 기획을 통해 한국영화가 100년이 됐다는 자체를 ‘사전에 알리는 데 포인트’를 두고 한국영화의 생일인 10월27일을 향해 달려왔다. 특히나 ‘K-CINEMA 100’은 상영회를 런던의 랜드마크와 연결시킨 점에서 그 기획력이 돋보인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을 모델로 한 《취화선》이 상영된 것이 대표적이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한국영화가 상영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행사에는 ‘팝콘 대신 새우깡’이 먹거리로 제공됐다. 후원사가 농심인 이유도 있지만, ‘자꾸 자꾸 손이 가는 국민 과자’를 한국적인 영화와 함께 나누고자 생각해 낸 아이디어라고. 한국영화의 지금을 응원해 준 관객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기도 하다.

영국 국립초상화갤러리에서 상영된 영화 《관상》 ⓒ LEAFF 제공
영국 국립초상화갤러리에서 상영된 영화 《관상》 ⓒ LEAFF 제공

《관상》의 경우 국립초상화갤러리를 공략했다. 관상과 초상화갤러리라니, 일단 절묘한 선택. 전 위원장은 갤러리 관계자에게 “당신 얼굴, 출세할 상”이라고 말하는 절묘한 전략도 구사했다. 기획전이 성사된 후에는 관객 선물로 마스크팩을 떠올렸고, 이를 위해 마스크팩 회사 메디힐 후원도 따냈다. 이건, 절묘한 위트랄까. 행사 당일 관객들에게 “내일 아침 왕의 용안이 될 수 있도록 마스크팩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객석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빵 터졌다는 후문이다.

여름엔 레스터 스퀘어 광장에서 야외상영을 통해 한국영화 네 편이 소개됐다. 《뽀로로 극장판 보물섬 대모험》(감독 김현호), 《파송송 계란탁》(감독 오상훈), 《덕구》(감독 방수인), 《맨발의 꿈》(감독 김태균) 등이 그 주인공이다. 《맨발의 꿈》 상영 때는 영화 소재에 맞춰 손흥민 선수에게 “한국영화를 위해 기여해 주십사 메일로 공식 초청을 했다”고 밝혔다. “마침 대회가 있어서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손흥민 선수 측에서 좋은 취지의 행사에 초청해 줘서 고맙다는 뜻을 전해 왔다”고 덧붙였다.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건 지난 9월, ‘토탈리 템스 페스티벌’과 협업해 진행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다. “런던 사람들은 템스강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우리가 한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런던 사람들은 템스강을 자신들 미래의 생명수라고 생각한다. 템스를 공략해 보자 하다가 한강을 떠올렸고, 한강이 떠오르자 《괴물》이 따라왔다”고 말한다. 한강을 템스강에 옮겨놓은 셈. “《기생충》이 칸에서 수상하면서 행사는 더 특수”를 탔다. 200명의 관객이 컵라면과 소주를 나누며 배에서 《괴물》을 함께 즐겼다.

한국영화를 알리기 위해 여러가지 기획에 앞장 서 온 전혜정 런던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K-CINEMA 100’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지난 3월부터 런던 시내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배우 류준열과 함께 촬영한 사진. ⓒLEAFF 제공
한국영화를 알리기 위해 여러가지 기획에 앞장 서 온 전혜정 런던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K-CINEMA 100’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지난 3월부터 런던 시내 전역에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배우 류준열과 함께 촬영한 사진. ⓒLEAFF 제공

전 위원장은 이러한 일련의 행사에 대해 ‘페어링’이라는 단어를 썼다. “장소와 그 장소에 맞는 주제를 페어링하고, 상영 설정에 맞춰 관객에게 줄 선물을 또 페어링해 한국영화 100년을 신나게 알려보고 싶었다”는 전 위원장은 단순히 영화인이라기보다 문화 전파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과거 영화 소개에 힘쓴 전 위원장은 “영화제 시작부터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번 영화제에 젊은 배우들을 주목할 수 있는 한국영화 작품 22편을 선정해 ‘미래 K-CINEMA 100’ 섹션으로 소개한 이유다. 이번 영화제는 지난 1년간 달려온 기획들을 종합하고 결산하는 동시에 다음 스텝으로 가기 위한  강력한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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