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대꾸와 혐오 발언과 표현의 자유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2 17:00
  • 호수 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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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혐오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말대꾸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터진 입 가지고 아무 말이든 다 하는 것이 나의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로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다. 모욕 주고 공격하고 차별하는 말들, 이런 말을 일컬어 혐오 표현 또는 혐오 발언이라고 부른다. 혐오 발언은 정말로 표현의 자유가 될 수 있을까? 이를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가능할까?

굉장히 거창한 주제지만, 오늘은 그냥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싶다. 《말대꾸》(캐서린겔버/유민석)라는 책이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혐오 발언을 구분하는 방법에서 시작해, 이에 맞서 법적 제약을 가하는 것이 왜 부적절한가를 살피고 그에 대항하는 힘을 기르기 위한 정부 정책이 어떻게 시행되어야 할지를 파고드는 책이다. 이름하여 말대꾸 정책이다. “혐오 표현의 피해자들이 대응할 수 있도록 제도적, 물질적, 교육적 지원을 제공해 주는 것”이 말대꾸 정책의 의미다. 혐오에 맞서 그를 무력화시키는 대항 발언을 할 개인의 역량을 기르는 일과 그에 대한 국가의 지원.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등장하는 다양한 말대꾸

일단 말대꾸가 뭔지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차별하고 혐오하는 발언은 말 그 자체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권력을 휘두르는 일종의 행위다. 이 때문에 혐오 발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주눅 들고 상처 입게 된다. 이에 맞서는 대항 발언을 이 책에서는 말대꾸라 부른다.

인기 행진 중인 영화 《82년생 김지영》에는 다양한 말대꾸가 등장한다. 시집에 가서 부엌에 줄창 박혀 있던 김지영은, 시누이가 등장하는 순간 빙의된다. 빙의란 흔히 접신이니 하는 식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이해되는데, 나는 그것이 우연한 접신이 아니라 억눌린 자아가 다른 인격의 탈을 쓰고 드러나는 것이라고 본다. 차별에 항의하는 말대꾸, 모욕을 격파하는 말대꾸, 이 모든 것들을 김지영은 본래의 자아로는 할 수 없었기에 빙의라는 통로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김지영이 본래 모습으로 말대꾸를 하는 장면이 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쏟은 자신을 보며 “맘충”이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에게 정면으로 항의한 것이다. 은근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면이다. 빙의의 장면들이 김지영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일종의 해설이라면, 이 장면은 행동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중의 한 장면
영화 《82년생 김지영》 중의 한 장면

혐오 발언뿐 아니라 ‘아무 말 대잔치’들에 대해서도 말대꾸는 훌륭한 대응전략이 될 수 있다. 가볍게 맞받아치는 것만으로도 상당수의 혐오 발언은 중화시킬 수 있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메갈리아가 수행했던 미러링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데 있다. 혐오 발언이 공격하는 대상들은 그 공격당하는 위치 때문에 쉽게 말대꾸를 하기 어렵다. 김지영이 왜 빙의의 형식을 빌려 말해야 했겠는가. 어릴 적에 몹시 부당한 어른들의 발언에 대항하려고 하면 “말대꾸하지 마라” “어린 것이 눈 똑바로 뜨고 어른에게 달려드냐”는 식의 더한 억압을 당한 기억이 너무 선명하다. “여자가 말이야”라고 시작되는 수많은 발화들에 적절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분함이 아직도 남아 있다. 혐오 발언이 공격하는 사람들은 취약하다. 정부가 어떻게 지원을 하면 혐오 발언을 줄이고 대항 표현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국가가 수행하는 말대꾸 정책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까. 할 말은 많지만, 차별금지법부터 제정하자는 말로 맺는다.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국민의 범주부터 넓히는 것이 국가의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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