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책보기] 민주주의 적(敵) 민주주의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19.11.0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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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만능인가?》ㅣ김영평, 최병선 등 7명 지음ㅣ가갸날 펴냄ㅣ240쪽ㅣ1만 5000원
ⓒ 가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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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은 제 1장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라는 것부터 우선 명토를 박아놓았다.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민주주의를 꼽는 학자도 있는 마당이라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국가체제는 없는 것으로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과연 민주주의는 수저나 바퀴처럼 더 이상 개선이 불필요한 완전발명품일까? 

민주주의의 큰 원칙은 법치, 삼권분립, 다수결이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잘못 전해졌다는 ‘악법도 법이다’는 격언이 사람이 아닌 법에 의한 통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권력기관끼리 견제와 균형을 위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이 이뤄졌고, 10명 중 과반인 5명 이상이 찬성하면 의결하는 다수결 제도가 생겼다. 다수결의 직전 과정이 타협안을 이끌어 내는 논쟁이라 민주주의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본질을 타고났다. 고로 시끄럽지 않고, 일사불란한 국가는 문제가 있다.

지금 행정부 내 법무부 외청인 검찰(청)의 권력이 너무 세니 견제해야 한다는 검찰개혁을 두고 국민들도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찬반논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이게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워 누구 말이 맞는지 도대체 가늠이 안 되던 차라 7인의 정치학, 행정학 박사들이 공동 저자인 《민주주의는 만능인가?》가 얼른 눈에 띄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법치주의는 법률의 내용이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견제와 균형이 민주주의 파괴를 막는 방파제는 못 된다. 그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위기 신호이다. 고로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를 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체제일 뿐이다.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자유의 오남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하는 세력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있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허용된다. 국민의 보통선거를 통해 집권세력을 결정하는 방법에 민주주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민주주의의 발목을 잡는 지역주의 정치,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으로 망해버린 베네수엘라, 인류최악의 살륙자 히틀러, 늘 불안한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지금까지 큰 사랑을 받아온 링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민주주주의의 개념이나 정의로는 부적절하다. 깊은 생각 없이 보고 들으면 근사하고 멋진 말이지만, 악용될 소지와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 이 개념과 정의는 마땅히 국민의 것이어야 할 자유와 권리를 시나브로 국가의 손으로 이전하고, 자위의 빈사 상태로 갈 위험성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시스트나 나치, 북한 정권 등 전체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의 가면을 버젓이 쓰게끔 만들어주는 이 개념은 이제 버려야 한다. 만일 살아서 자기의 뜻을 무참히 곡해하고 악용하는 이런 사례들을 보았더라면 링컨 대통령도 무척 속이 상하고 화가 나지 않을까?’라는 것이 저자들의 진단이다. 대제국 로마의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원로원 체제의 공화정을 파괴하고 황제 통치를 도입했던 카이사르도 폭군 네로나 칼리큘라를 보았다면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까?

‘인공지능(AI), 게놈(Genome) 등 정보통신, 생명공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융합이 인간의 삶의 양상에 어떤 충격을 줄지는 심히 불확실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장래에 미칠 영향도 지금으로서는 예측이 쉽지 않다. 제기되는 문제들은 매우 공공적인 성격의 문제들이지만,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민주주의가 과연 적합한 의사결정 체제인지 많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정치형태가 새로운 삶의 양식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다’는 주장은 ‘구글(Google) 제국’이 뒷받침한다.

그러나저러나 핵심은 ‘다수결은 무조건 정당하냐’는 것이다. ‘다수결은 의견이 갈리는 문제의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정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방법의 하나일 뿐, 다수결의 결정이 항상 옳은 결정인 것은 아니다. 다수결은 여러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인공지능, 생체기술, 원자력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문제를 비전문가들의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옳은 방법은 아니다. 다수결은 지극히 민주적인 원리로 무조건 받아들일 대상이 아니라, 오용과 악용의 위험성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할 대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민대표들이 참석하는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항상 만장일치다. 공산당의 인민재판은 공개된 광장에서 다수결로 처형을 결정한다. 제 1당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제정된 국회선진화법이 오히려 국회를 식물국회로 전락시켰다. 과연 다수결은 무조건 정당한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이 귀족정치(Aristocracy)를 주장했던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작금의 혼란을 극복해 민주주의가 더욱 상큼하게 작동되는 나라로 진일보하기 위해 국민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시점이다. 《민주주의는 만능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은 존 애덤스 미국 대통령의 아래와 같은 통찰로 끝난다.

“민주주의는 영속되는 법이 없다. 곧 쇠퇴하고, 탈진하고, 자살한다. 이제껏 자살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없다. 국민이 민주주의를 잘못 사용하면 민주주의가 자살할 수도 있다.”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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