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시대 토기 굽던 가마터 창녕서 발굴 “역대 최대 규모”
  • 부산경남취재본부 김호경 기자 (sisa525@sisajournal.com)
  • 승인 2019.11.07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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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천리 토기가마 유적 발굴…1600년전 손 자국 완벽 보존
현존하는 최대 규모 가야토기 가마…천정벽면 상태 완전

1600년전 가야인의 손자국이 완벽하게 원형으로 남은 가마터가 경남 창녕군 퇴천리에서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창녕군은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원장 배덕환)이 발굴하는 ‘창녕 퇴천리 토기가마터 발굴조사’ 현장을 11월6일 오후 일반에 공개했다.

이날 공개한 ‘창녕 퇴천리 토기가마’는 천정부까지 원형 그대로 발굴된 최초의 사례이자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가야토기 가마로 확인돼 문화재청과 역사학계에서 높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창녕지역의 고대 국가인 ‘비화가야의 역사문화’ 복원에 중대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창녕 퇴천리 토기가마터. 회구부와 연소부는 물론, 천정까지 완벽히 보존된 가마터는 국내 최초로 학계의 높은 관심을 사고 있다. ©시사저널 김호경
창녕 퇴천리 토기가마터. 회구부와 연소부는 물론, 천정까지 완벽히 보존된 가마터는 국내 최초로 학계의 높은 관심을 사고 있다. ©시사저널 김호경

이번 발굴 조사는 창녕군 비화가야 역사문화 복원사업의 하나로, 비화가야의 토기 생산과 공급 체계 등 학술적인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유적 보존 대책을 마련하고자 지난 7월부터 진행하고 있다. 유적에서는 토기가마 1기를 비롯해 토취장(가마 운영에 필요한 흙을 채취한 구덩이), 폐기장(가마 조업 시 발생하는 폐기물을 버리는 곳), 배수로 기능을 겸한 구덩이가 확인됐다.

 

천정벽면 완전한 상태…가야 토기가마 얼개 조업방식 한 눈에

비화가야 토기가마터 조사는 1991년과 1993년 여초리 토기가마터에서 처음으로 이뤄졌다. 당시 여초리 토기가마터 조사는 가야의 토기가마 구조와 생산 체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발굴조사로 꼽히고 있다. 발견된 토기 가마는 지금까지 발굴된 가야시대의 토기 가마들 가운데 가장 크다. 특히 가야인들이 10여차례 보수한 가마의 천정부 벽면(두께 130cm)이 온전한 상태로 처음 드러났다. 1500여년전 가마에 불을 때고 고열로 내부를 가열한 흔적이 천장벽면에 고스란히 아롱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토기 가마의 얼개와 더불어, 토기를 넣고 배열하고 굽고 꺼내는 등의 세부 작업 방식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획기적 단서를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출토품은 큰 항아리와 화로형 그릇받침, 짧은목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이다. 유물들이 나온 양상으로 미뤄 가마는 큰 항아리를 주로 굽기 위해 만들어졌다. 생산시기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토기가마터 위로 7세기 전반께의 신라 돌방무덤 3기가 조성된 흔적이 나타나 이후 창녕 지역을 차지한 신라인들이 무덤 자리로 버려진 가마터를 썼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연도부(가마 끝)에서 바라본 가마터. 가마의 천정부분이 완벽히 보존돼 있으며, 연소부 상단의 화구도 볼 수 있다. ©시사저널 김호경
연도부(가마 끝)에서 바라본 가마터. 가마의 천정부분이 완벽히 보존돼 있으며, 연소부 상단의 화구도 볼 수 있다. ©시사저널 김호경

가마터의 규모는 길이 15m, 너비2.3m, 깊이2.3m로 지금까지 확인된 국내 최대이며, 10여차례에 걸친 토기 생산과 벽체(두께 1.3m)와 천정 보수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가마터 내부 천정과 벽면에는 짚을 섞은 황토를 손으로 일일이 바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황토와 섞여 있는 짚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마터발굴조사 보다 입체적인 비화가야사 복원이 우선

발굴을 맡은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창녕 퇴천리 비화가야 가마터는 지난 91~94년 창녕 여초리 가마터에 이어 25년만에 조사된 대형 토기생산지”라며 “그 형태가 가장 완전한 상태인 동시에 여러 차례 보수를 통한 가마의 구조 변화도 볼 수 있는 등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다양하고 중요한 고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창녕 퇴천리가마터는 4C~5C초에 조성된 것으로 호류를 주로 생산하던 가마로 특히, 제작 공정상 여러 부윌 나누어 제작한 뒤 접합하는 등의 성형과 소성에 매우 높은 기술을 요하는 대호(큰 항아리)를 주생산품으로 삼아 당시 가야인들의 우수한 예술성을 보여준다”며 “이번 가마터발굴조사를 시작으로 보다 입체적인 비화가야사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가했다.

토기가마 내부에서 연도부 모습. ©시사저널 김호경
토기가마 내부에서 연도부 모습. ©시사저널 김호경

현장에 동행한 창녕군 어경애 홍보계장은 가마터 내부에 새겨진 손자국에 자신의 손을 대 본 뒤 “1600년전 창녕 가야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벅찬 감동을 받았다”면서 “찬란한 유물을 남겨준 가야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정우 창녕군수는 “국내 최초로 완벽한 원형의 토기가마터 발굴로 비화가야사 복원의 토대가 될 것”이라며 “특히 현재 진행중인 비화가야 고분과 산성등의 조사와 함게 유적 보존 방안을 수립해 문화재 지정도 추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군수는 이어 “송현동 고분등 수많은 유적지와 문화재와 함께 역사문화탐방 벨트를 주진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창녕퇴천리 가마터는 지난 92년 최초 발견된 이후 방치돼있던 것을 창녕군이 동아세아문화재단에 발굴을 의뢰해 올해 5월30일부터 6월 13일까지 시굴조사를 거쳐 7월23일부터 본격 발굴작업을 해왔다. 이날 가마터 발굴현장 공개행사에는 국내 언론사와 학자 등 60여명이 참석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가마터 내부 천정과 벽면에는 당시 가야인 도공들이 짚을 섞을 황토를 손으로 시계방향으로 바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사저널 김호경
가마터 내부 천정과 벽면에는 당시 가야인 도공들이 짚을 섞을 황토를 손으로 시계방향으로 바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사저널 김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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