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쇄살인범] 부자와 여성들을 증오한 사이코패스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15 16:00
  • 호수 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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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도 안하무인 황제로 군림 중...8개월간 20명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유영철의 연쇄살인을 촉발한 것은 맹목적인 적대감과 삐틀어진 증오심이었다. 청소년기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유씨는 친구 소개로 마사지사인 황아무개씨와 만나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다. 하지만 유영철은 범죄 인생을 청산하지 못하고 특수절도죄로 구속됐다. 1991년 4월 유씨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에 도착해 호송차에서 내렸다. 재판정으로 이동하던 중 나무 십자가를 발견하고는 “이건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하고 주워서 법정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중 자기보다 혐의가 중한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것을 보고는 금방 풀려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유영철은 실형을 선고받아 석방의 꿈이 좌절됐다. 그는 자신이 실형을 받은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며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품었다. 그리고 “신은 없다”며 손에 들고 있던 십자가를 부수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유영철은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후인 1993년 6월 황씨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다.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가 됐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이후에도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생활이 반복됐다. 남편의 범죄행각에 염증을 느낀 황씨는 2002년 5월 이혼소송을 제기했고, 유영철은 아들에 대한 양육권마저 빼앗겼다.

그는 황씨와 아들을 살해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교도소 벽면에는 출소하면 살해할 사람들의 숫자까지 적어가며 살해 의지를 다졌다. 그는 이때부터 언론에 보도된 그간의 연쇄살인 사건 등 기사 내용을 분석해 완전범죄를 계획했다.

오로지 ‘살인’만을 생각하며 출소할 날만 기다리던 유영철은 2003년 9월11일 교도소 문턱을 나가게 된다. 잠시 어머니 집에 머물던 그는 마음먹은 대로 차근차근 살인을 준비했다. 동물을 희생양 삼아 살인 실험까지 했다. 이를 통해 흉기보다는 둔기가 효과적인 살해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004년 8월31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뒤편 야산에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경찰과 검찰 직원들과 함께 자신이 진술한 발굴 작업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04년 8월31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뒤편 야산에서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경찰과 검찰 직원들과 함께 자신이 진술한 발굴 작업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연쇄살인의 서막 오르다

유영철은 교회가 잘 보이고 정원이 있는 부잣집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평소 햇빛이 잘 드는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에 예쁜 꽃이 핀 집을 부러워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것을 빼앗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또 교회 근처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것은 교회 가까이 살아도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다. 범행시간대는 주로 노약자나 부녀자들만 집에 있는 출근 후 오전 시간을 택했다.

2003년 9월24일 오전 10시쯤, 유영철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망교회 근처를 배회하며 범행 대상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회색 그랜저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이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유영철은 주택 뒤편 담장 아래로 이동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가죽장갑을 끼고 담을 넘어 정원으로 침입했다. 이 집은 숙명여대 명예교수인 이아무개씨(73) 부부가 살고 있었다. 

유영철은 집 안의 동태를 살피며 코팅 목장갑으로 갈아 끼고,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서서히 현관으로 이동한 그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안방문 앞에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인기척이 있자 거실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각 방문을 열어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1층 거실로 내려와 안방문을 열어젖혔다. 이때 이 명예교수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유영철은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잭나이프로 목을 찔러 쓰러뜨리고, 해머로 머리를 수차례 내리쳐 살해했다.

이 광경을 본 이 명예교수의 아내 이아무개씨(68)가 바르르 몸을 떨면서 장롱 속에 있는 돈을 꺼내 주려 하자 “내가 돈 때문에 그런 것 같으냐”면서 해머로 내리쳐 살해했다. 그다음 장롱을 뒤지고 문을 열어놓아 강도로 위장했다. 유영철의 연쇄살인은 이렇게 서막이 올랐다.

약 보름 후인 10월9일 오전 10시10분쯤, 유영철은 서울 종로구 구기동 영광교회 근처에 있는 고아무개씨(60) 집에 침입했다. 유씨는 이곳에서 고씨의 어머니(85)와 아내(60), 아들(35)까지 살해했다. 유영철은 고씨까지 살해하려고 했으나 개 짖는 소리가 들려 강도로 위장한 후 도주했다. 이 집은 한순간에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10월16일 낮 12시30분쯤, 이번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최아무개씨(70) 2층 단독주택에 침입했다. 당시 집 안에는 최씨의 아내 유아무개씨(60) 혼자 있었다. 유영철은 최씨를 위협해 화장실로 끌고 간 뒤 둔기로 내리쳐 살해했다.

유영철은 서서히 살인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자 더욱더 자신감을 가졌다. 약 한 달 후인 11월18일 그는 종로구 혜화동 혜화성당 인근 단독주택을 노렸다. 이 집에 가스배관을 타고 침입해 집주인 김아무개씨(87)와 파출부 배아무개씨(53)를 살해했다.

유영철은 이번에도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현관문 밖에 있던 곡괭이와 전지가위를 들고 와 금고를 훼손했다. 그러던 중 가위가 튀면서 오른쪽 손가락을 베었다. 이때 방바닥에 피가 떨어지자 스카치테이프와 휴지로 손가락을 감아 지혈했다. 이어 혈흔 자국으로 인해 범행이 들통날까봐 신문지와 옷가지에 불을 붙여 방화를 시도했으나 일부만 태우고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김상중 경감이 유영철이 여성 마사지사들을 살해한 후 암매장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 정락인 제공
김상중 경감이 유영철이 여성 마사지사들을 살해한 후 암매장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 ⓒ 정락인 제공

교도관 위협하고 수감자에게 폭력 행사도 

유영철은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4차례에 걸쳐 무려 8명을 살해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장애인이었다. 같은 해 11월 하순쯤 언론에서 ‘버팔로 신발’을 신은 사람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나왔다. 유영철은 자신에게 수사망이 좁혀올 것을 두려워했다. 당시 신고 다녔던 버팔로 신발을 폐기하고 거주지도 마포구 신수동 고시원에서 같은 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유영철은 12월 전화방을 통해 만난 김아무개씨(27)와 동거를 시작했다. 두 달 정도 김씨와 살면서 청혼까지 했지만 범죄전력과 직업, 학력, 가족관계가 거짓으로 들통나면서 거절당했다. 2004년 2월 유영철은 김씨가 다른 남자와 만났다는 것을 알고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김씨가 성관계를 하려면 선불을 달라고 하자 이에 격분해 몸을 묶고 강제로 성관계를 가지면서 폭행을 가하자 이에 겁을 먹고 만남을 꺼리게 된다.

유영철은 김씨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집요하게 보내는 등 재결합을 시도했으나 거주지도 옮기고 연락 자체가 두절되자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는 김씨에게 당한 배신감을 보상받고자 같은 업종인 전화방 도우미나 출장 마사지사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주택에 침입하는 대신 자신의 오피스텔로 유인한 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암매장하는 수법을 썼다. 그는 인터넷 자료검색을 통해 토막 살해 장면 등을 집중적으로 다운로드하고 살인 방법을 익혔다. 시신 훼손 후 암매장이 쉽도록 쇠톱, 가위 등을 준비했다.

2004년 3월15일, 유영철은 전화방에서 연결된 권아무개씨(23)와 서대문 소재 한 쇼핑센터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신수동 오피스텔로 유인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관계를 갖은 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권씨가 도망가려 하자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해 인근 대학교 도서관 뒷산 등산로에 암매장했다. 

유영철은 돈을 갈취할 목적으로 경찰 신분증도 위조했다. 2004년 4월14일 오후 7시쯤, 유씨는 서울 황학동 도깨비시장 일대에서 노점을 하던 안아무개씨(44)에게 접근했다. 그는 가짜 경찰신분증을 보여주고 약사법 위반 등으로 체포한다며 수갑을 채웠다. 그러고는 수갑의 한쪽을 안씨의 승합차 안 손잡이에 고정시켰다.

유영철은 승합차를 운전해 자신의 오피스텔 근처의 한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이어 해머와 망치를 이용해 살해했다. 이후 안씨의 봉고차량을 운전해 인천 월미도로 가서 시신과 차량을 불태웠다.

이후 유영철은 거주지를 마포구 신수동 오피스텔에서 인근 노고산동으로 옮긴다. 이곳에서 같은 해 7월13일까지 전화방 도우미나 출장 마사지사 여성 11명을 살해해 토막 낸 후 봉원사 뒷산에 암매장했다. 2003년 9월부터 8개월간 총 20명이 희생됐다.

유영철은 2014년 7월15일 보도방 업주들에게 잡힌 뒤 경찰에 넘겨졌다.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현 광역수사대)로 연행된 유영철은 간질병에 걸린 것처럼 연극했다. 경찰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15일 밤 12시쯤 형사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기수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경찰은 비상을 내리고 기수대 형사들을 총동원해 유영철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기수대 3계 소속이던 김상중 형사(현 용산경찰서 지능팀장)는 동료들과 함께 유영철의 동선을 파악한 후 해당 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의도에서 영등포역 사이 영등포 로터리 부근에서 그를 체포할 수 있었다. 도주한 지 11시간 만이다. 성폭력, 강간살인, 시체손괴 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유영철은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유영철은 교도소 안에서도 여전히 안하무인이다. 죄책감과 반성은커녕 교도관들을 위협하거나 협박을 일삼고 수감자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등 교도소 황제로 군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무조건 힘든 것은 열외이며 맛있는 부식은 먼저 차지한다고 전해진다. 

 

유영철 살인 현장, 지금은…

오피스텔은 신축되고 암매장 현장은 지형 변해

1970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한 유영철은 한 살 때 서울에 올라왔고, 마포구에 정착했다. 유씨는 전화방 도우미나 출장 마사지사, 황학동 노점상 등 12명을 자신의 거주지에서 살해했다. 기자는 최근 유씨의 살인 현장인 오피스텔과 암매장 지역을 찾아갔다.

유씨가 최초 전화방 도우미를 살해한 곳은 마포구 신수동의 오피스텔이었다. 해당 오피스텔은 15년 전 그대로였다. 인근에는 황학동 노점상을 살해한 병원 주차장이 있다. 해당 병원은 철거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유영철은 노점상 살해 후 근거지를 인근 노고산동 오피스텔로 옮겼다. 이곳에서 마사지사 여성 11명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했다.

해당 오피스텔은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다. 당시 1층에 있던 홍어집 대신 다른 음식점이 들어섰다. 유영철이 거주하던 오피스텔에서 직선거리로 30m 전방에는 서강지구대 노고산 치안센터(당시 노고산 파출소)가 있다. 바로 코앞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졌는데도 경찰은 아무런 눈치도 못 채고 있었던 것이다.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한 상인은 “지금도 유영철 이름만 나와도 가슴이 섬하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그대로”라고 말했다. 유영철은 이곳에서 토막 낸 시신을 비닐봉지에 담아 택시를 타고 가 봉원사 뒷산에 암매장했다. 이곳의 지형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근처에 있던 찜질방은 상호를 변경한 채 그대로 영업 중이었다. 사건 현장과 연결된 철문은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암매장 현장을 함께 찾은 김상중 경감은 “당시 암매장 현장 옆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천 공사를 통해 물길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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