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눈물] 우리가 알던 홍콩은 이제 없다
  • 홍콩/ 조해수 기자 (chs900@sisajournal.com)
  • 승인 2019.11.25 07:30
  • 호수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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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현지 100시간 특별취재①] 제국의 벽에 가로막힌 민주화 열망의 현장
“SOS! Hongkong” “Korea, stand by Hongkong” 간절함 엿보여

‘동양의 진주’로 각광받던 홍콩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난 4월3일 홍콩 정부가 송환법(범죄인 인도 법안)을 입법 예고하면서 촉발된 홍콩 시위는 지금까지 6개월여 동안 지속되고 있다. 시위대는 송환법이 반중(反中) 활동을 하는 홍콩 시민들을 중국 본토로 잡아가기 위한 악법이라고 여겼다. 수백만 명의 시위대가 운집하자 깜짝 놀란 홍콩 정부는 지난 7월9일 송환법 폐기를 공식 선언했지만, 시위대는 멈추지 않았다.

송환법이 추진될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홍콩의 자치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홍콩의 대통령(행정수반)이라 할 수 있는 ‘행정장관’은 1200명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된다. 시위대는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가 아닌 홍콩 시민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행정장관을 뽑기 위해 직선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우리나라의 1987년 ‘6월 항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시사저널 특별취재팀은 11월18~21일까지 4일간 홍콩 현장을 취재했다. 도착 첫날인 18일, 홍콩 폭력시위는 절정에 달했으며 21일은 폭력시위의 계기가 된 ‘백색 테러’가 발생한 지 정확히 4개월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7월21일, 위엔랑 지하철역에서는 흰옷을 입은 친중(親中) 성향 의심 세력들이 검은 옷을 입은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시위대의 과격화에 불을 댕겼다.

ⓒ 시사저널 고성준
ⓒ 시사저널 고성준

▒ 11월18일: 내전 방불케 한 홍콩의 밤

11월18일 밤~19일 새벽의 홍콩은 내전이 발발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극한 상황이었다. 프린스 에드워드, 몽콕, 야우마테이, 조던, 침사추이, 홍함, 셩완, 센트럴 등 홍콩의 주요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18일 오전, 시위대의 중심지였던 홍콩 이공대에 대한 경찰의 진압과 봉쇄가 시작되자 시위대가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날 본지 취재진은 화염에 휩싸인 프린스 에드워드, 몽콕, 야우마테이 일대를 집중 취재했다. 이곳은 서울 종로~동대문시장과 비슷한 곳으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 중 하나다.

밤 8~9시부터 도로는 이미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를 쓴 시위대가 대로는 물론 골목 곳곳에 빼곡히 들어섰다. 마스크를 썼지만 앳된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시위대는 모두 홍안(紅顔)의 젊은이들이었다. 상점들은 모두 셔터를 내렸고, 행인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거리에는 오직 검은 물결만이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거리는 오히려 고요했다. 대열을 맞춰 구호를 외치거나, 누군가 나서 연설을 하는 모습도 없었다. 지휘부가 없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저 소규모 무리가 형성돼 한쪽에서는 투석전에 사용할 보도블록을 깨고, 다른 한쪽에서는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유리병에 시너를 부어 화염병을 제조했다. 상점에 설치된 CCTV를 부수는 모습도 보였다. 거리에는 돌을 깨는 소리와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위해 철제 간판을 끄는 소리만 가득했다. 오싹할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벽돌을 나르고 있던 한 여성 시위자는 “우리의 5대 요구 사항(송환법 철회, 경찰의 강경진압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것 철회, 체포된 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은 이미 수없이 외쳤다”면서 “구호만으로는 홍콩을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지금도 (홍콩 이공대 등) 많은 친구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있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기자에게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향항인 보구(香港人 報仇: 홍콩인이여 복수하라)’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밤 10시경, 고요를 깨고 폭풍이 몰아쳤다. 진압경찰이 시위대 바로 앞에 방어진을 형성하면서 본격적인 대치가 시작됐다. 시위라기보다 전쟁에 가까웠다. 밤 10시30분이 넘어서면서 도심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고 최루탄이 터졌다. 야우마테이 인근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화염병이 연이어 날아들면서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됐다. 왕복 4차선 도로가 교차하는 시티뷰 호텔 앞 사거리는 불기둥이 솟으면서 대낮처럼 밝아졌다. 주먹보다 더 큰 벽돌도 여기저기서 떨어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포하며 시위대의 진격을 막아섰다. 고무탄뿐만 아니라 최루탄도 시위대를 직접 겨냥해 발포됐다. 화염에 최루가스까지 합쳐지면서 거리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방독마스크 없이는 단 1분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 시사저널 고성준
11월19일 새벽 홍콩 야우마테이 인근에서 시위대와 대치 중이던 무장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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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경찰이 최루탄 및 고무탄을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자 시위대가 우산으로 막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기자와 EMS 관계자 바로 옆에서도 가차없는 진압 

거리에는 ‘탕, 타당’ ‘퍽, 퍼엉’ 소리만 메아리쳤다. 경찰은 진압 전 사이렌을 울리거나 시위 해산 방송도 하지 않았다. 시위대 역시 묵묵히 전진할 뿐이었다. 양쪽 모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적을 상대하는 군인들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시위가 6개월여 지속되면서 홍콩 젊은이들은 이미 투사로 변해 있었다. 시위대의 최전방에는 우산을 펴들고 전진하는 이른바 방패부대가 있다. 그 뒤로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공격부대가 있다. 공격부대에 화염병을 가져다주는 보급부대는 더욱 체계화돼 있다. 보급부대는 2열 종대로 길게 줄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줄은 300m까지 이어져 있었다. 줄의 마지막에는 화염병을 제조하는 생산부대가 있고, 여기서 만들어진 화염병이 손에서 손으로 전방까지 전달됐다. 줄 사이에는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는데, 이 길을 통해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 화염병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정이 다 돼 갈 때쯤, 경찰은 갑자기 대대적인 진압에 착수했다. 전방은 물론 옆 골목에서도 치고 들어오며 시위대의 허리를 끊는 ‘토끼몰이’식 진압이었다. 시위대는 속절없이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진압은 무자비했다. 경찰 2~3명이 시위자 한 명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바닥에 눕힌 다음 군홧발로 밟아 수갑을 채웠다. 기자와 EMS(Emergency Medical Service·응급치료) 관계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가차 없는 진압이 이루어졌다.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위대 옆을 지나가던 한 중년 여성이 진압 모습을 보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진압은 순식간이었고, 거리는 핏자국으로 덧칠해졌다. 도주에 성공한 시위자 중 한 명은 상태가 심각했다. 고무탄이 눈 주위를 가격한 것이다. 함께 도주한 시위자는 “경찰이 이 사람의 얼굴 쪽으로 고무탄을 4~5발 발사했다”면서 “(EMS 관계자가) 실명은 물론 뇌손상까지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했다”며 분노했다.

시위대는 바리케이드를 후방에 다시 세우며 재정비에 나섰다. 소강상태가 20~30분 유지되다가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면 시위대는 또다시 퇴각했다. 이와 같은 과정은 새벽까지 반복됐고, 첫 대치 지점에서 1km까지 밀려난 시위대는 결국 새벽 4시경 해산했다.  

ⓒ 시사저널 고성준
11월19일 새벽 홍콩 야우마테이 인근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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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 위엔랑 역 요호몰에서  7·21 백색테러 규탄 연좌시위가 벌어졌다. ⓒ 시사저널 고성준

▒ 11월19~21일: 비폭력 시위로 전환

19일, 전쟁 같은 밤이 지나자 홍콩 거리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모습이었다. 시위도 어느덧 일상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낮에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20일 열린 ‘넥타이 부대’의 ‘런치 위드 유(Lunch with you)’ 운동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1987년 6월처럼 홍콩에서도 대학생이 선봉에 나서고, ‘넥타이 부대’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쿤통역 인근 IN 파크에는 낮 12시45분이 지나자 직장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1시쯤에는 200여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시위대의 5대 요구사항을 상징하는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쿤통역 인근 도로를 행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 역시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다. 신분 노출에 따른 불이익을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시위에 참여한 한 직장인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두렵다”면서도 “지식인들이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가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20~21일에는 대중교통 운행방해 운동인 ‘신희(晨曦·새벽빛)’ 운동이 열렸다. 오전 8시경부터 지하철 노선마다 ‘도어 방해 시위’(지하철 문과 스크린 도어가 닫히지 못하게 하는 것)가 일어나 역마다 10~20분 연착됐다. 이 밖에 21일에는 위엔랑 백색테러 규탄 연좌 농성, ‘함께 조깅하기’ 운동, 공무원 공무방해 운동 등이 홍콩 각지에서 열렸다.

 

실패한 ‘우산혁명’ 이번엔 극복할 수 있을까

19일 이후에 열린 시위는 모두 비폭력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20일부터 모든 초등학교·중학교 등이 수업을 재개했다. 시위대가 24일로 예정된 구의원 선거를 정상적으로 치르기 위해 폭력시위를 자제한 것이다.

구의원 선거는 18개 구의회에서 직접 투표를 통해 모두 452명의 의원을 선출한다. 구의원 선거가 중요한 것은 구의원 중 117명이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1200명의 선거인단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 층이 주축이 된 ‘민주파’에서 다수 출마한 상태다. 20일 신희 운동 현장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폭력시위가 자칫 24일 구의원 선거를 (홍콩 정부가) 연기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면서 “이는 홍콩 정부가 가장 원하는 일이다. 선거 때까지 폭력시위는 없을 것이다. 선거는 반드시 열려야 한다”고 말했다.

홍콩 자치를 요구하는 청년들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다 결국 실패한 ‘우산혁명’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각오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제국은 너무나 거대하고 견고해 보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홍콩 시위를 ‘급진 폭력 범죄행위’라고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다. 홍콩 시민들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시위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몽콕 야시장의 한 음식점 주인은 “대학생들의 요구에는 충분히 공감한다”면서도 “그러나 먹고사는 데까지 지장을 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대중교통을 방해하는 신희 운동이 대표적이다. 폭력시위도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시위대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바라고 있다. 기자가 시위대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Thank you. Be careful”이었다. 위험한 현장에서도 시위대의 뜻을 세상에 알려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점심 시위에는 “SOS! HK(hongkong)”라는 피켓과 함께 “법안 통과에 대해 감사합니다(Thank you for Passing the Act!)”라는 성조기가 등장했다. 미국 상·하원에서는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는 ‘홍콩 민주인권법안’이 통과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만을 기다리고 있다. 금융업에 종사한다고 밝힌 한 직장인은 기자의 손을 잡으며 “한국, 홍콩을 지지해 달라(Korea, stand by Hongkong)”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불안한 휴전 속 홍콩의 내일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던 홍콩은 이제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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