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문재인의 서로 다른 도전…FTA와 신남방정책
  •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03 11:00
  • 호수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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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례없는 FTA 체결 국가…아세안은 최대 해외 건설시장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세계는 탈냉전이라는 큰 변화를 맞았다. 그리고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세계화 물결 속에서 30년을 지내왔다. 냉전의 붕괴와 더불어 1990년대 초반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보다 자유로운 상품 및 서비스 교역을 가능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을 비롯한 많은 개도국들은 활짝 열린 선진국 시장을 무대로 급성장했다.

이런 다자간 통상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1992년 유럽연합(EU) 출범 그리고 1994년에는 미국·캐나다·멕시코 간의 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됨으로써 지역을 중심으로 한 별도 통상체제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다자간 체계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시장 통합과 확대를 추구하는 이와 같은 지역 자유무역협정(FTA)은 한국에 시장의 축소를 가져올 수 있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수출과 교역을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뤄왔던 우리로서는 이러한 추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FTA에 뒤따르는 시장 개방 및 각종 제도의 변화였다. 1990년대 초반 WTO 체제 출범을 앞두고 농산물 시장 개방 논의 과정에서 홍역을 치렀던 정부로서는 다시 한번 커다란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FTA 체결에 소극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25일 부산 힐튼호텔에서 한-아세안 환영만찬사 후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등과 건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1월25일 부산 힐튼호텔에서 한-아세안 환영만찬사 후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 등과 건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트럼프의 등장으로 위협받는 기존 통상 질서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진행되던 한·칠레 FTA를 전후해 큰 결단을 내린다. 소극적 대응에서 벗어나 오히려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FTA를 체결한다는 통상정책의 혁명적 변화였다. 거대 경제권과 자원부국 및 주요 거점 경제권을 중심으로 FTA를 체결하고, 순차적 방식이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이를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2004년 칠레를 시작으로 한국은 미국, EU 등 세계 최대 경제권 및 국가와 FTA를 연이어 체결하기 시작했다. 현재 16건의 FTA가 발효됐으며 영국, 이스라엘, 인도네시아와는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FTA 체결 국가가 됐다.

WTO와 FTA를 양대 축으로 하는 국제통상 질서가 보편화되는 것으로 간주됐으며, 이런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후해 기존 통상 질서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이 세계 각국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시장 확대를 통한 무역 규모 확대는 많은 국가와 개인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지만 그 와중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 및 국가들은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는 실업률 증가와 빈부격차 확대로 연결됐다. 소수에게 집중되는 자유무역의 혜택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으며, 특히 중국의 급성장 과정에서 피해를 보게 된 주요국 제조업 부문 종사자들은 정치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트럼프의 승리는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기존 통상 질서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NAFTA에 대한 대폭적인 변화를 요구해 관철시켰으며, 중국에 대한 대규모 관세 부과 조치를 감행해 무역분쟁을 촉발시켰다. 기존 통상 질서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가해지면서 세계경제는 후퇴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수출과 수입은 모두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통해 가능했다. 중국의 산업생산을 위해 필요한 수많은 중간재들이 중국으로 수출됐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무역상대국이 됐다. 인적 교류도 활발해짐에 따라 제주도와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당연해 보이던 우호관계는 2016년 사드 배치를 둘러싼 갈등으로 한순간에 급변했다. 호황을 구가하던 면세점을 비롯한 관광업과 화장품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 현지에 진출했던 기업들 역시 직간접적인 피해를 겪으며 큰 손해를 감수하고 철수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특정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보다 넓은 시장에 대한 접근이 필요함을 실감하게 됐다. 단순한 시장 다변화를 넘어 보다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지역 내 파트너를 찾는 우리의 눈에 아세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5년 출범한 아세안경제공동체는 10개국 6억5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토대로 세계 5위 규모의 거대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 저개발과 낙후된 지역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이 지역은 2000년대 이후 해외투자 증가를 기반으로 급속히 성장했고, 최근 글로벌 경기후퇴에도 불구하고 연 5%대 성장세를 유지 중이다. 저임금에 기반한 단순 생산지에서 벗어나 아세안 지역은 세계적인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인 그랩(Grab)을 포함한 다양한 서비스 산업이 성장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이와 같은 아세안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신남방정책을 발표하면서 이 지역과의 본격적인 협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과 아세안의 교역량은 1597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중동을 제치고 한국 최대의 해외 건설 시장으로 부상했다. 인적 교류 역시 급속히 확대돼 2018년 기준으로 총 1144만 명의 인원이 오가게 됐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아세안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으며, 경제적으로 긴밀한 파트너가 됐다.

 

아세안의 잠재력, 新남방정책의 출발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점도 생겼다. 베트남에 집중된 투자와 교역은 아세안 다른 국가들의 비판의 대상이다. 한·아세안 교역에서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15%에서 2018년 45%로 급속히 확대됐으며, 한국의 아세안 투자 52%가 베트남에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405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흑자 역시 아세안 국가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교역량 확대에 상응하는 농산물 등 아세안 국가를 위한 시장개방이 실효성 있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아세안은 하나의 이미지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함을 내포한 경제권이다. 10개 회원국은 경제 규모, 사회 수준 및 종교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에 맞춘 국가별 전략 수립이 요구되지만 우리의 아세안에 대한 이해 수준은 아직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급속히 변화하는 국제통상 질서는 새로운 도전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에 맞서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상황이다. 4강에 매몰됐던 대외적 시야를 넓히고, 다양함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우리의 영향력을 세련된 방식으로 확산시켜야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우리는 10여 년 만에 세계 주요 국가 및 경제권과 높은 수준의 FTA를 체결하고, 성장의 기반을 넓혀온 경험이 있다. 도전을 다시 시작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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