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험지라니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09 09:00
  • 호수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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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닮아 아름다운 섬 하와이가 한국에서 생고생이다. 누군가가 “니가 가라, 하와이”를 외치면서다. 유명 영화 대사인 이 문장 속의 ‘하와이’는 선거에서 당선되기 힘든 곳을 의미한다. 요즘 정치인들 사이에는 ‘험지(險地)’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험지는 국어사전 속의 뜻 그대로 ‘험난한 땅’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험지로 나가라’고 말할 때의 ‘험지’는 의미가 다르다. 한마디로 민심이 험해 표를 얻기가 쉽지 않은 지역을 가리킨다. 민심이 험하다니? 그 지역 사람들로서는 결코 듣기 좋은 말일 수 없다. 자신들을 쉽게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험난한 땅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을 누가 환영하겠는가. 지역은 늘 그대로 있어 왔는데 자기들이 잘못해 험지가 되었다는 생각은 왜 못 할까. 게다가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인물이 ‘험지 출격’ 명목으로 전략 공천되어 오는 것 자체가 해당 주민들에게는 날벼락이 될 수 있다.

선거는 ‘험지’나 ‘평지(平地)’의 문제가 아니다. 인물이, 정당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만큼 앞서 있으면 험지·평지 개념을 떠나 어디에서든 쉽게 당선할 수 있다. 인물이 나쁘면 인물을 바꾸면 되고, 당이 나쁘다면 당을 고쳐 쓰면 된다. 어느 정당에도 처음부터 험지였던 곳은 없다. 그 험지를 평지로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을 뿐이다. 괜한 민심 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먼저 책망하는 것이 옳은 순서다.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왼쪽)과 김영우 의원 ⓒ시사저널 박은숙·연합뉴스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자유한국당 김세연 의원(왼쪽)과 김영우 의원 ⓒ시사저널 박은숙·연합뉴스

여당 소속의 이철희·표창원 의원에 이어 야당 소속 김세연·김영우 의원이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진영을 떠나 앞으로의 활약이 더 기대되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불출마를 아쉬워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내놓은 말들을 곰곰이 새겨보면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들의 말 속에는 현 정치권에 대한 극한의 실망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이철희 의원은 “지독하게 모질고 매정했다”고 했고, 표창원 의원은 “좀비에게 물린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김세연 의원과 김영우 의원은 자신이 몸담은 당을 향해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 “한국당은 너무나 작은 그릇”이라는 독한 말까지 내놓았다.

이유야 어찌 됐건 이들의 불출마 행렬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혼탁한 정치라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덜 뻔뻔한 사람들이 더 뻔뻔한 사람들에게 밀려나고 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지금 우리 정치권에 어떤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한지는 이미 분명하다. 표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는 ‘험지’를 누가 우리 정치에서 만들고 있는지도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그동안 험지는 험지대로 놓아둔 채 텃밭의 과실만 열심히 탐해 왔던 이들의 반성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표를 달라고 할 때는 간·쓸개라도 다 내줄 듯 바짝 몸을 낮추던 이들이 국회만 들어가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 왔다. 최근에는 법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시민을 냉정히 뿌리치는 모습까지 처참하게 목도해야 했다. 그런 이들이 의기양양하게 터를 잡고 있는 그곳이 바로 민심의 험지다. 민생과 예산안을 내팽개치며 20대 국회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이들이 무슨 염치로 험지·평지를 따진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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