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V 페라리》 심장 박동 7000rpm에 탑승하시라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07 14:00
  • 호수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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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향연인 영화 《포드 V 페라리》

클래식의 향연이다. 추억 속 클래식 카들의 질주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아날로그 정서가 인간의 땀 냄새와 함께 풍겨 나오는 《포드 V 페라리》에서는 클래식 무비의 향취가 물씬 난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권장할 수 있다. 탑승하시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승승장구하던 포드는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매출 부진에 빠진다. 위기의 순간 기지를 발휘하는 건 (먼 훗날 미국 자동차 산업의 귀재로 불리는) 마케팅팀장 리 아이아코카(존 번탈)다. 아이아코카는 새로운 소비 주체로 떠오른 베이비붐 세대를 공략하기 위해 스포츠카를 주목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구닥다리 자동차를 원하지 않아요. 이탈리아의 페라리처럼 섹시한 차를 갖고 싶어 합니다.” 마침 스포츠 경주에서 절대적 1위를 차지하고 있던 페리리가 파산 위기에 놓이자 아이아코카는 페라리를 인수해 포드의 브랜드 이미지를 바꾸려고 한다.

포드가 페라리 인수에 성공했다면, 레이싱 분야에 경험이 일천한 포드가 절대 강자 페라리를 꺾고 ‘르망 24’에서 우승하는 전설적인 스포츠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쓰이는 법. 레이싱 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페라리 창업자 엔조 페라라는 컨베이어벨트로 자동차를 찍어내는 포드(나부랭이)가 무슨 스포츠카를 만드냐며 포드의 제안을 거절한다.

《포드 V 페라리》가 아닌 ‘포드 V 포드’인 이유

심지어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를 향해 “넌 헨리 포드가 아니야. 헨리 포드 2세일 뿐”이라고 도발하는데, 이것이 헨리 포드 2세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지시가 떨어진다. “르망 24에서 페라리를 박살 낼 차를 만들어라!” 이 허무맹랑해 보이는 계획은 그러나 레이서 출신 자동차 엔지니어 캐롤 셸비(맷 데이먼)와 자동차 정비공인 괴짜 레이서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에 의해 현실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포드 V 페라리》가 미국 자동차의 우수성을 찬양하려는 ‘미국 뽕’ 영화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다. 포드와 페라리의 드라마틱한 경쟁을 다루기보다, 카 레이스 경기에 참여한 두 남자가 대기업 시스템 내 복잡한 역학관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지에 맨골드의 관심이 기울어져 있다.

이 과정에서 셸비와 마일스의 장애물로 기능하는 건 페라리가 아니라 포드다. 즉 내부의 적이다. ‘을’의 위치에 있는 셸비와 마일스의 열정은 ‘갑’인 포드의 관료주의 앞에서 연신 고꾸라지고 자빠진다. 관료주의에 찌든 포드사 임원들의 방해 속에서 소신을 잃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가속페달을 밟는 셸비와 마일스의 모습은 흡사 대자본의 규제와 억압에 맞서 유의미한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예술가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건 스포츠 영화의 탈을 쓴 장인들의 이야기이자, 돈으로 모든 걸 살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자들과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고 믿는 두 남자의 대결이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미생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영화의 메시지는 스포츠카의 두군거리는 엔진 소리와 결합해 상업영화로서의 재미도 움켜쥔다.

성격이 불같고 직설적이며 매사 융통성이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 진정한 가치를 향해 핸들을 꺾을 줄 아는 켄 마일스는 크리스찬 베일의 치밀한 연기로 스크린에 되살아난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30kg을 감량한 (고무줄 몸무게로도 유명한) 이 배우가 놀라운 건 단순히 체중을 줄였다는 게 아니라, 캐릭터에 깊숙이 침투해 내고자 하는 연기를 대하는 자세다.

심장질환으로 레이서의 길을 조기 은퇴하고 엔지니어로 인생 경로를 변경한 캐롤 셸비는 자신의 꿈을 켄 마일스의 질주에 태워 함께한다. 스토리상 조연에 머무를 법한 캐릭터지만, 맷 데이먼이 부여한 인격과 개성 덕분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켄 마일스와 캐롤 셸비는 성격도 사는 방식도 판이하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닮았다. 개인의 영광보다 자동차가 주는 황홀감 그 자체에 미쳐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찬 베일과 맷 데이먼도 그와 같아 보인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기라는 우물을 파고 있지만, 연기라는 그 자체에 흠뻑 빠져 있는 배우들이니까.

영화 《포드 V 페라리》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영화 《포드 V 페라리》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체감 러닝타임 ‘빠름!’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르망 24’는 24시간 동안 제일 긴 거리를 달린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경기다. 즉 스피드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달릴 수 있는 차의 내구성, 질주 전략, 레이서와 엔지니어의 호흡 등이 필수다. 《포드 V 페라리》는 잘 구성된 레이싱팀을 닮았다.

제임스 맨골드라는 역량 있는 드라이버가, 중량감 넘치는 믿음직한 배우들을 연료로, 드라마와 레이싱의 조화를 이뤄내며 박력 넘치게 달린다. 152분이라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길어서 지루하다’는 쪽보다, ‘체감 시간이 짧아서 놀랍다’ 쪽에 가깝다. 보통의 차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당도하는 레이싱 카들처럼, 관객을 엔딩 지점에 빠르게 데려다 놓는다.

아드레날린 치솟는 레이싱 영화

레이싱 경주는 위험이 따르는 만큼,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영화가 레이싱 경기 소재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러시-더 라이벌》은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로 불리는 ‘F1(포뮬러1 월드 챔피언십)’의 유명한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다. 1976년 F1 역사상 가장 뜨거운 명승부를 펼친 두 라이벌 제임스 헌트와 니키 라우다가 그 주인공이다. 바람둥이 스타일의 불세출의 천재였던 제임스 헌트 역은 토르로 유명한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아 시선을 끌었고, 레이스 도중 일어난 사고로 재기 불능 상황까지 갔으나 불굴의 의지로 복귀한 니키 라우다는 다니엘 브륄이 연기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승리에 집착하는 단순한 라이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됐던 이상적인 라이벌로서의 모습이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와 함께 영화에 녹아 있다.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이 연출한 《세나: F1의 신화》는 11년의 시즌 중 3번의 월드 챔피언과 총 41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서킷의 영웅으로 불린 전설적인 드라이버 아일턴 세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 등으로 유명한 영국 워킹 타이틀이 내놓은 최초의 다큐멘터리로, 1994년 이탈리아 산마리노 그랑프리가 열리는 이몰라 서킷에서 34살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세나의 삶을 좇는다. 세나를 모르는 관객들도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세나: F1의 신화》를 만든 팀이 다시 모여 만든 다큐멘터리 《F1, 본능의 질주》도 있다. 정상급 레이서들의 삶을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로 넷플릭스가 자체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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