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어쩌다 보니…어쩔 수 없이
  • 김정헌(화가, 4.16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1 18:00
  • 호수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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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고행의 연속이다. 물론 다행히 간혹 가다 고행의 사이사이에 기쁨이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나는 나의 인생을 때에 따라서는 우연한 일로 보기도 하고, 더러는 필연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어쩌다 보니’와 ‘어쩔 수 없이’를 주문처럼 외우며 산다.

내가 몇 년 전 미국에서 그 유명하다는 예일대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미술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전시를 하고 있는 전시회의 어떤 작품에 눈이 꽂혔다. 중동의 여인들로 보이는 차도르를 입은 수십 명의 여인이 앞에 보이는 바다를 향해 무작정 전진하고 있는 장면인데 이를 찍은 사진 작품이었다. 이 사진 작품을 보는 순간 나는 ‘이 여인들은 어쩌다 보니, 혹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가?’라는 끝없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다음부터 나는 이 ‘주문’을 외우며 살다시피 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나의 개인전 제목에도 이를 붙였다. ‘어쩌다 보니…어쩔 수 없이…’ 김정헌 초대 개인전이다.

나는 평양에서 태어나 엄마 등에 업혀 남쪽으로 내려왔고 서울에서 잠시 살다가 6·25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 가 초등학교를 다니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중·고는 물론 미술대학까지 거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고 있다.

나는 1946년 5월생인데 자주 나를 ‘45년생 해방둥이’로 자칭한다. 이유는 이렇다. 만주에 사시던 나의 부모님들은 만주 대련에서 해방을 맞으셨다. 이때 8·15 해방을 맞아 독립만세를 한 차례 부르시고 아버님이 “여보, 우리 기념으로 애나 하나 더 만듭시다”라고 하셔서 그 즉시로 나는 잉태됐으리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내가 페북 등에 실어 자주 나의 ‘해방둥이’론을 까발리곤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다음해 정확히 9개월 며칠 만에 내가 평양에서 1녀 5남의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는 정확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이렇게 태어난 나는 ‘어쩌다 보니’보다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셈이다. 한국의 해방, 또한 평양에서 홍역에 걸려 다 죽어가던 일, 어머니의 등짝에 업혀 38선을 걸어 넘은 일, 산동네에서의 부산 피난살이, 우연찮게도 미술대학에 들어간 일, 그래서 민중미술가로서 화가의 삶을 살아온 일, 한국문예위 위원장이 된 일로부터 이명박 정부에서 숙청당한 일 등등이 다 어쩌다 보니 생긴 일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어쩔 수 없는 필연이 곳곳에 숨어 있다. 이를 쉽게 팔자라고 부르지만 이는 민속에서 얘기하는 팔자와는 다르다. 일종의 정해진 우주의 운행 내지 섭리라고 해야 할 듯싶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주의 섭리로 태어난 나는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삶의 존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태어난 나는 나를 ‘존엄’하지 않는다. 자기를 타자화한 결과다.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우주의 운행에 따라 섭리로 결정되지만 작게는 집안의 여러 가지 곡절과 사연이, 즉 한 집안의 내력과 서사나 역사가 그 안에 내재돼 있고 그 안에서 한 인생의 생과 사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전시의 작품들도 다 필연적인 사연들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민중미술은 한국만의 독특한 저항미술이다. 민중미술로 행해졌던 모든 그림엔 이런 저항의 역사와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그런 사연 있는 그림들이 재미있지 않을 리 없다. 내 전시는 내년 1월5일까지니 이를 못 본 이 칼럼의 독자들은 와서 보기를 권한다. ‘어쩔 수 없이’ 이번 칼럼은 내 전시회 선전이 되었다. 독자들이여 이해하시라.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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