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를 왕자로 만든 ‘박항서 매직’의 비결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redpill@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3 17:00
  • 호수 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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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축구 60년 숙원까지 달성…현지 언론, 박 감독의 단결력·전술·인간미 평가

베트남 축구의 영웅 박항서 감독이 성공신화에 또 한 장면을 추가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 축구대표팀은 2019 동남아시안(SEA)게임 남자축구 정상에 올랐다. 베트남은 12월10일 필리핀 마닐라의 리살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인도네시아를 3대0으로 완파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남아 국가들이 참가하는 종합 스포츠 제전인 SEA게임은 국가 간의 자존심이 걸린 주요 대회다. 그중에서도 최고 인기 종목인 남자축구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다. 23세 이하 팀이 참가하는 연령별 대회지만 스즈키컵과 더불어 동남아 양대 타이틀로 꼽힐 정도다. 하지만 베트남은 남베트남이 지난 1959년 1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뒤 60년간 축구 금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2년 단위로 열리는 대회임을 감안하면 무려 28번이나 기회를 놓친 셈이다. 북베트남이 통일을 함에 따라 1959년 우승도 사실상 인정 않는 상태다. 반면 ‘숙적’ 태국은 16회로 최다 우승을 기록, 베트남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지난 11월 베트남축구협회와 연장 계약(2+1년)을 한 박항서 감독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의 첫 과제도 바로 60년 만의 SEA게임 금메달이었다. 결국 그 미션마저 완벽하게 수행했다. 조별리그에서 4승1무를 기록, B조 1위로 4강에 오른 베트남은 토너먼트에서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를 완파했다. 조별리그 최종전에선 태국과 2대2로 비기며 라이벌을 탈락시키는 ‘쾌거’까지 거뒀다.

60년을 기다린 베트남의 국가적 열망을 채운 박 감독은 이영진 수석코치를 비롯한 선수단과 함께 특별전세기를 타고 하노이로 돌아왔다. 곧바로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총리가 기다리는 공관으로 향한 선수단은 축하행사를 마주했다. 박 감독을 격하게 안은 푹 총리는 “이번 승리가 다시 한번 베트남의 발전에 큰 영감을 줬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베트남 체육국과 대기업들은 4억원가량의 보너스를 준비해 둔 상태다. 경기장과 베트남 시내에서 응원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건 익숙한 모습이 됐다.

12월10일 2019 동남아시안(SEA)게임 남자축구 정상에 오른 베트남 선수들이 박항서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 REUTERS
12월10일 2019 동남아시안(SEA)게임 남자축구 정상에 오른 베트남 선수들이 박항서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 REUTERS

실패를 모르는 리더십에 베트남은 또 환호했다

환갑의 나이에 베트남 축구를 이끄는 도전을 택한 박항서 감독은 부임 후 지난 2년 동안 완벽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부임 후 베트남 축구는 실패를 잊었다. 부임 후 첫 주요 대회였던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베트남을 준우승으로 이끄는 파란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참가하는 대회마다 새 역사를 썼다. 아시안게임 4강, 스즈키컵 무패 우승, 아시안컵 8강을 기록하며 동남아 무대를 완벽히 제패한 뒤 아시아 무대에서도 경쟁력을 나타냈다. 현재 진행 중인 2022 카타르월드컵 2차 예선에서도 태국·UAE를 제치고 조 1위를 달리는 중이다.

그런 평가를 바탕으로 박항서 감독은 계약 만료를 반년가량 앞두고 지난 11월 재계약을 맺었다. 연봉은 기존 보수의 3배 이상 상승한 것으로 알려졌다. SEA게임 우승은 박항서 감독과의 재계약이라는 선택에 베트남 전체가 재확신을 갖게 만든 선물이었다. 스즈키컵에 이어 SEA게임까지 정복하며 베트남은 동남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한 수 위의 상대 태국을 밀어내고 지역 최강자로 확실히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과연 박항서 감독 부임 후 베트남 축구는 무엇이 변했을까? 베트남 최대 스포츠 매체인 ‘봉다’는 SEA게임 우승 후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는 단결력이다. 현역 시절부터 열정 넘치는 선수로 유명했던 박 감독은 지도자가 된 뒤에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과 불같은 투지를 강조했다. 이런 요소가 나약하고, 쉽게 포기하던 베트남 축구의 체질을 바꿔놨다. 그다음은 합리적인 실용 전술이다. 자신들만의 기술 축구에 집착하며 뚜렷한 경쟁력과 색깔을 내지 못하던 베트남은 스리백을 기반으로 경기 중 수시로 변화하는 박 감독의 실리 축구를 만나 성공신화를 이어가는 중이다. 부임 초기 박 감독의 스리백 구사에 반감을 보였던 베트남 현지는 이제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무너트리는 변칙 전술과 예측 불가능한 라인업에 환호한다.

마지막은 따뜻한 인간미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박 감독은 진정성 있는 스킨십을 통해 선수들의 마음을 샀다. 팀 내부에서는 아버지 같은 존재고, 외부로는 팀을 확실히 지켜주는 보스가 됐다. 야간에 선수들의 치료를 직접 돕는가 하면, 라커룸에서는 울림 있는 메시지로 선수들을 감동시킨다. SEA게임 결승전에서는 스코어가 3대0으로 벌어진 후반 막판 인도네시아 선수들이 베트남 선수들에게 거친 플레이를 거듭 하자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하다 퇴장을 당했다. 경기 후 박 감독은 “열정이 과했다. 자중하도록 하겠다”고 사과했지만 베트남 국민들은 ‘가족을 지키는 아빠 닭’이라는 묘사로 오히려 환호했다.

 

다음 목표는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

이번 SEA게임 금메달로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의 비원 달성에 마침표를 찍었다. 2017년 부임 당시 그에게 주어진 최대 미션은 10년 만의 스즈키컵 우승과 60년 만의 SEA게임 금메달이었다. 두 대회 다 지역 대회지만 국가 간 경쟁심이 치열한 동남아에서는 월드컵과 같은 개념이다. 박항서 감독 부임 후 황금기를 맞은 베트남 축구지만, 정작 선수단을 이끄는 수장의 생각은 다르다. 동남아를 벗어나 이제는 세계 무대를 지향하는 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실제로 그는 재계약 단계에서도 이 부분을 강하게 요구했다. 베트남과 한국 언론들은 두 차례의 협상 결렬이 돈 문제라며 자극적인 보도를 이어갔지만, 실제 박 감독은 베트남축구협회에 확실한 미래 청사진을 요구했다. 베트남축구협회는 이미 대기업들의 지원을 받아 박 감독의 명예를 지켜줄 금액을 제시했지만 정작 목표로 다시 한번 스즈키컵 등 지역 대회 우승을 언급한 것이다. 박항서 감독은 “재계약을 통해 다시 도전한다면 더 큰 목표가 있어야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했다. 결국 베트남축구협회는 연봉 등 개인 조건 외에도 인프라와 시스템 개선을 제시했다. 베트남 정부 차원의 지원이 약속된 뒤 박 감독은 재계약에 서명했다.

박항서 감독은 다음 2년 동안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을 1차 목표로 언급하며 베트남이 동남아라는 우물을 벗어나 바다로 향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베트남 축구 역사상 월드컵 최종예선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아시안컵과 U-23 챔피언십에서 경쟁력을 확인한 박 감독은 충분히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확신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베트남은 2차 예선에서 태국·UAE·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와 함께 G조에 속해 험난한 여정이 예상됐지만 현재 승점 2점 차의 여유 있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 남은 3경기에서 2승 이상을 거두면 최종예선 진출이 유력하다.

1월에는 태국에서 열리는 U-23 챔피언십에서 2018년에 이은 또 한 번의 성과를 준비한다. 박항서 신화의 출발점에 다시 서는 것이다. 여기서 3위 이내에 들면 베트남은 최초의 올림픽 본선 진출도 이루게 된다. 지난 대회 준우승팀인 베트남은 23세 이하 대회에서는 아시아의 손꼽히는 강호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한국 입장에서도 가장 부담스러운 경쟁자다. 박 감독은 12월14일 선수단을 이끌고 한국으로 와 경남 통영에서 올림픽 본선 진출을 위한 담금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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