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이 기억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 한동희 PD (firstpd@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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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끝짱]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별세…그를 기억하며

[시사끝짱]

■ 진행: 소종섭 시사저널 편집국장
■ 대담: 이준석 바른미래당 前 최고위원
■ 제작: 시사저널 한동희 PD, 조문희 기자, 양선영 디자이너
■ 녹화 : 12월10일(화)


소종섭: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과거 재계 서열 2위까지 오른 대그룹을 일군 큰 별이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준석 전 최고위원은 젊으니까 김우중이라는 인물이 가까이 와 닿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준석, 대우와 각별한 인연…父 대우 상사맨 출신

이준석: 전 굉장히 가까이 와 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유학 갔다 오니까 강남 출신 자제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소종섭: 금수저 아니냐? 

이준석: 제가 상계동 출신인 이유는 저희 아버지가 첫 직장으로 들어가신 곳이 대우상사였어요. 대우상사가 지금은 서울 스퀘어 건물이 됐지만. 

소종섭: 옛 서울역 바로 앞에? 

이준석: 그렇죠. 대우빌딩이잖아요? 그 대우빌딩이 서울역 4호선이잖아요? 4호선으로 출퇴근하기 가장 편하고, 가장 집값이 싼 곳이 그 당시 상계동이었어요. 게다가 종점이니까 앉아서 갈 수 있고. 그래서 처음에 저희 아버지가 상계동에 정착하셨고 제가 30년 뒤 상계동에 출마해서 지금 이렇게 나오고 있는 겁니다. 어릴 때 아버지 보러 상계역에서 대우빌딩까지 지하철 타고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죠. 지하철 종이 표 끊어가지고, 어린이용은 초록색이었는데 그게 다 기억납니다. 

소종섭: 저는 시골서 기차 타고 올라오면 그때만 해도 다 서울역에서 내릴 때니까, 서울역에서 나오면 앞에 대우빌딩 큰 게 딱 있잖아요. 그것이 정말 엄청난 성벽처럼 딱 가로막고 있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근본적으로 김우중 회장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나요? 

이준석: 아버지는 이직하셨는데, 대우라는 기업이 몰락하는 과정이 기억에 남죠. 

소종섭: 아, IMF 때? 

 

“IMF 당시 대우그룹, 구조 취약해…해체 이해된다”

이준석: 결국 구조조정이나 빅딜을 통해 대한민국의 대기업 집단이 하나씩 바뀌어가는 모습 속에서 대우를 봤었는데, 사실 지금 와서 제가 경제를 공부하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도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형태의 기업이었고. 반대로 지금 봤을 때는 굉장히 위험한 형태의 기업집단이었다, 이런 생각인데. 대표적으로 약간 왜곡되기도 하지만 기술은 사 오면 된다(는 형태의 기업집단이었다.) 사실 지금 중국에 있는 기업들 보면 그렇게 하는 기업들 있거든요? 기술 사와서 생산력이나 생산기술을 최적화하면서 잘 나가는 중국기업들이 있고, 그 시기 경제 단계에서는 필요한 기업들이다. 그런데 그 뒤에 너무 무리하게 확장하다 보면 분식회계가 수십조 단위로 나온다(는 리스크도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가는 측면과 더불어 굉장히 위험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시사끝짱

소종섭: 우리 현대사에서 수많은 기업들이 명멸을 했는데, 기업들 성장사 몇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대우처럼 처음에 순수하게 자기 돈 갖고 시작해서 대그룹을 일군 경우가 있고 지금으로 치면 롯데, 금호그룹 기업입니다. 그런가하면 선대부터 땅을 많이 갖고 있어서 이른바 토지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성공적으로 바꾼 재벌기업들이 있어요. 삼성이나 엘지, 지에스 이런 쪽이 거기에 해당이 되죠. 그리고 또 한 그룹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시대 적산 기업을 돌아봤다든지 전쟁 와중에 성장한 이런 기업들, 한화라든지 이런 쪽이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IT붐을 타고 대기업이 된 네이버로 대략 분류가 되는데. 대우그룹 같은 경우, 김우중 회장이 1967년 자본금 500만 원 가지고 처음 시작해서 재계 서열 2위까지 갔습니다. 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이 이겁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이게 그 당시의 젊은이들한테 엄청난 영감과 도전의식을 줬거든요. 

 

“떠나는 순간마저 아쉬움 남았을 것”

이준석: 동유럽 진출이라든지 이런 거는 제가 봤을 때 지금도 그 여파로 생산기지들이 많이 남아있는 것들 보면 꽤 획기적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대우, 삼성 이런 기업들이 어느 시점에 전부 다 배를 만들거나 차를 만들었고 어느 시점에는 전부 다 냉장고를 만들었고 어느 시점에는 전부 다 건설을 했고. 사실 과다 경쟁이라는 틀 자체가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생각해요. 일본도 마찬가지잖아요. 과거 히타치, 도시바, 미스비씨, 이런 곳들이 만드는 품목이 거의 중복됐잖아요. 결국 2000년대 초반부터 정리되어 갔는데, 대우는 이들보다는 더 일찍 정리단계로 들어섰던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 대우라는 사명을 달고 있는 업체가 없죠. 대우건설 정도, 대우증권도 최근 합병이 됐고. 그러다 보니까 김우중 회장 입장에서는 떠나는 순간까지 아쉬움이 많았을 것 같다. 왜냐면 본인이 예전에 기자 회견을 하면서 그 당시 기업 해체 공작에 당했다는 취지로 말을 했잖아요?

 

베트남서 계속된 ‘세계경영’…청년사업가 양성

소종섭: 우리 현대사에서 보면 여러 가지 아픔들이 많이 있죠. 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같은 경우, 이준석 전 최고위원이 아까 얘기했지만, IMF 당시 대우가 해체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위험 신호들이 있었고. 급성장의 신화,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에게 세계경영의 꿈과 화두를 던져준 그런 인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른바 문어발식 경영, 정경유착, 이런 측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IMF 이후에 대우가 몰락하면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근까지 베트남에서 젊은 기업가, 청년 김우중을 길러내겠다, 이런 활동도 했어요.

ⓒ시사끝짱

이준석: 베트남 같은 경우에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형태의 기업이 필요하다. 김우중 회장이 활약했던 시기의 대한민국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겠죠. 그래서 그런 시도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베트남 하노이에 대우의 흔적이라는 것이 많이 남아있다, 이런 생각했던 것이 예전에 경남기업도 대우가 갖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경남기업이 거기다 랜드마크를 만들어놓은 것도 봤고 그런데 자동차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대우 이미지가 굉장히 살아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사실 하나의 자신이기 때문에 굉장히 아쉬운 거겠죠. 사실 한번 구축해놓은 상사 네트워크라는 것이 국가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일본 아니겠습니까? 외교관은 파견이 안 돼도 상사직원은 파견돼가지고 정보를 취득하고 하나라도 팔 게 없느냐를 수집해서 국부를 창출하는 것 자체가 사실 저희 아버지도 그렇게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로망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하는 거죠. 

소종섭: 대우는 잘 나갈 때는 보니까 98년도에 해외 현지법인, 해외 네트워크가 589곳에 달했다고 나오니까 대단했던 거죠. 그 당시 대우맨들은 과거 몽골 제국의 비유할 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면에서 대우의 세계경영이라는 부분이 던진 화두가 있는 거죠. 김우중 회장의 기업이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남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옛일이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김우중 전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이준석 최고 의원님 오늘 수고했습니다. 

이준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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