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시인부터 ‘아나키스트’ 시인까지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1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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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3화 - 시대와 맞선 저항 시인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요즘 광화문 광장을 지나다 보면 한 건물 외벽에 걸린 대형 글귀를 마주하게 된다. 시인 윤동주가 일제 강점기 때 지은 《호주머니》란 동시의 구절이라고 한다. 갑북갑북은 ‘가득’이란 말의 평안도 방언으로, 이 시는 “힘든 식민지 현실이지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힘을 내자”는 뜻으로 읽힌다. 12월3일 내걸린 이 글판은 때마침 윤동주 시인의 탄생일이 오는 30일이라 더욱 그 의미가 더해진다.

광화문의 ‘명물’로 자리잡은 가로 20m, 세로 8m의 대형 글판은 계절마다 문구를 교체하면서 29년 동안 이어져 왔다. 이 일은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건네자”는 교보생명 창업주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에서 사업을 펼치다가 군자금을 모집하던 시인 이육사를 만나 “반드시 큰 사업가가 되어 독립 자금을 대겠다”고 다짐했고 훗날 사업을 일구어 그 약속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이런 감동적인 사연을 알고 나면 ‘총 대신 펜’을 들고 부당한 시대와 맞선 시인들의 모습이 글판과 자연스레 오버랩 되기 마련이다.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걸린 글판과 윤동주. 오른쪽은 중국 룽징에 있는 그의 생가
광화문 교보빌딩 외벽에 걸린 글판과 윤동주. 오른쪽은 중국 룽징에 있는 그의 생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저항의 아이콘

유명한 낭만파 시인인 영국의 조지 고든 바이런(1788~1824)도 저항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놓인 그리스가 1821년 독립전쟁에 돌입하자 바이런은 “모든 유럽인은 그리스인이다”라고 호소하며 전쟁터로 향했다. 그의 참전 소식은 전 유럽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바이런은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있더라”는 자신의 말마따나 시인으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각상 같은 외모를 갖춘 미남 귀족으로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자면 세계적인 ‘아이돌 스타’가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셈이었다.

아무리 고대 그리스 문학에 푹 빠진 탓이라고는 하나 ‘방탕한’ 귀족 시인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 등장하는 장면은 선뜻 상상이 되질 않는다. 여하튼 바이런을 비롯한 다국적 의용군은 그리스로 향했고, 유럽 각국의 군대도 그리스 독립군을 지원했다. 그는 군함을 마련하는 비용을 댔고, 적의 요새 공격에도 참여했으며, 그리스군을 직접 통솔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말라리아 열병에 걸려 3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사후 5년 뒤 독립을 이루게 된 그리스에서는 지금도 바이런을 침략에 맞서 싸운 위대한 ‘시성(詩聖)’으로 기리고 있다.

바이런과 베트남의 시각장애인 시인 응웬 딘 찌에우
바이런과 베트남의 시각장애인 시인 응웬 딘 찌에우

그리스 독립전쟁에 개입한 유럽 열강들은 곧바로 대대적인 식민지 공략에 나섰다.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과 프랑스가 소비재 시장 확보를 위해 중국·인도·동남아 지역에 군홧발을 들이댄 것이다. 제국주의 침략이 거세지자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국에선 당연히 외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따랐고, 이와 함께 수많은 시인들이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프랑스 침략에 맞선 베트남에서도 우리의 김삿갓 같은 ‘방랑시인’으로 유명한 응웬 반 지아이 나 ‘장님 시인’으로 불린 응웬 딘 찌에우 등이 시를 통한 애국심 고취에 앞장섰다.

응웬 딘 찌에우(1822~1888)는 과거 시험을 보러 가다 눈병을 얻어 시력을 잃게 되었다. 그 후 한의사가 된 그는 서당을 열어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식민 지배를 규탄하는 저항시를 많이 남겼다.

「 적의 얼굴을 마주하느니

  영원한 어둠을 마주하는 것이 낫다.

  눈은 멀었으나 가문의 고결함을 잃지 않는 것이

  눈은 있으나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

침략 전쟁이 격화되면서 게릴라 의병대를 지원하기도 한 그는 프랑스 측에서 수차례 회유하려 했지만 끝내 거절하고 지조를 잃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룩 반 티엔》 시집이 전해지며 호찌민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는 ‘나일강의 시인’으로 불리는 하피즈 이브라힘(1872~1932)의 활동이 돋보였다. 영국의 보호령 아래 놓여진 이집트에서 1919년에 우리의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민중 시위가 벌어지자 그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시를 지어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식민지 조선에서도 저항 시인들의 활동이 이어졌다. 시인 이상화가 민족의 울분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를 발표했고, 같은 해 만해 한용운이 시집 《님의 침묵》(1926)을 펴낸데 이어 이육사의 《청포도》 《절정》 《광야》 등 많은 저항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육사(1904~1944)는 투철한 민족의식과 역사관이 투사된 시인으로 손꼽힌다. 그의 대표작 《광야》의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란 구절에서 보듯 그는 절망하고 체념하는 대신 저항하고 또 희망을 노래했다. 이육사는 또한 17차례나 투옥될 정도로 ‘총과 펜을 함께 든’ 행동파 시인이었다. 1925년 무장독립단체 의열단에 가입한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이때 그의 수인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로 택했다고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그는 해방을 1년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이육사의 ‘절정’ 시비와 경북 안동에 위치한 문학관. 오른쪽은 우에무라 타이
이육사의 ‘절정’ 시비와 경북 안동에 위치한 문학관. 오른쪽은 우에무라 타이

눈여겨 볼 건 이육사와 한 살 터울인 일본인 시인 우에무라 타이(1903-1959)의 시와 삶이다. 놀랍게도 그의 시에서 전개되는 제국주의 침략의 부당함은 조선의 어느 저항 시인의 그것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교원을 지내다 불교전문학교를 마치고 사찰의 주지를 겸하게 된 그는 부락민 해방운동에 가담했다가 ‘탈출하듯’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의 나이 26살 때였다. 1년 남짓 《조선과 만주》잡지에서 편집 일을 하며 시를 발표하던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고 모임을 가진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으로 추방당했다.

필자가 우에무라 타이에 주목하게 된 건 추방되던 당시의 심경을 담은 《조선을 떠나던 날》이란 시를 접하고였다. 

「 누가 나의 눈을 흐리게 하려는가

   누가 나의 귀를 가리려 하는가

   나는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아시아의 맨 끝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부정을, 불의를, 위만을, 압살을 」

우연히 조선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일본인 청년이 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고백시를 쓰게 된 걸까.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아나키스트 시인》이란 책에서는 “식민지 현실에 강한 분노를 느낀 그가 이를 타파하기 위한 방도로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였다”고 풀이했다. 조선 민중의 끔찍한 삶이 그를 반체제 시인으로 변모시켰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는 귀국한 후 일제의 권위적인 통치와 억압에 대항하고 나아가 조선의 해방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7년 동안 수감 생활을 거치면서도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한 일본 시인을 분노케 한 식민지 현실

시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갖지는 못할 지라도, 부당한 시대에 맞선 시인들이 내뿜은 결기는 여전히 우리 가슴을 뛰게 한다. 그렇기는 하나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라며 식민지의 힘든 현실을 노래한 시가 건물 외벽에 내걸려 있고, 그 지하 서점에는 일본 기업의 돈에 ‘벌거벗은’ 학자들이 쓴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버젓이 베스트셀러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가슴 답답할 뿐이다. 이 딱한 풍경은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도려내지 못한 데서 오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웅변해 주고 있다. 우에무라 타이가 조선을 떠나며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 지금 이 반도의 남단에 서서

   부딪쳐 솟구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지그시 참아내고 있다.

   끓어오르는 나의 격정을

   등 뒤로 느껴지는 천만의 피로 물든 눈동자의 외침을

   친구여! 눈으로 본 것을 어찌 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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