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 아니라 추억을 파는 게 장사다
  • 이형석 한국사회적경영연구원장․KB국민은행 경영자문역 (ls@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6 07:30
  • 호수 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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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비즈니스로 대박 낸 기업들…급속한 모바일화로 비즈니스 모델도 진화

1980년대 말 대한YWCA연합회는 ‘아나바다 나눔터’ 운동을 시작했다. 대국민 재활용 운동으로는 국내 최초 시도였다. 1990년대 말에는 보다 진화한 ‘아나바다 경매’ 서비스가 야후코리아 등을 통해 시작됐지만, 글자 그대로 이벤트로 끝났다.

국내에서 중고시장이 상업적으로 확산된 것은 IMF 구제금융 때다. 뜻하지 않은 소득 감소로 가계가 어려워지자 가지고 있던 명품을 내다 팔았다. 없어졌던 전당포가 다시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다. 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대척점에는 사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위한 중고 명품 가게도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당포에 맡기던 사람들이 직접 가게에다 판 것이다.

비즈니스 탄생 배경을 보면 일반적으로 사회단체들이 캠페인으로 시작해 시장이 확보되면 민간시장으로 넘어가는 패턴을 보인다. 재활용, 즉 중고 사업이 좋은 예다. 과거에는 절약정신이 키워드였다면 지금은 환경보호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점만 다르다. YWCA가 이끌고 민간시장이 바통을 넘겨받은 흐름이다.

2008년 불거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고 명품숍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 연합뉴스
2008년 불거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고 명품숍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 연합뉴스

중고 비즈니스 효시는 ‘아나바다’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중고시장이 활성화됐다. 일본 최초의 중고 비즈니스는 1967년 시작된 도요타의 중고차 경매였다. 민간 소매시장으로 3R(Recycle, Reuse, Reduce)이 확산된 것은 불황기가 본격화된 1993년경이었다. 1990년대 말에는 리사이클숍이 4만5000개까지 늘어났다.

어떤 현상이 3년 이상 지속되면 습관이 된다. 일본의 절약정신도 불황기를 보내며 하나의 소비 습관이 됐다. 이런 소비층을 발 빠르게 공략한 기업이 일본의 유일한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인 메루카리(メルカリ)다. 중고 물품을 사고팔 수 있는 C2C 벼룩시장 플랫폼이 비즈니스 모델로, 2013년 창업해 2016년 흑자로 전환했고, 최근 상장해 기업 가치를 약 5조원대로 올려놓았다.

전 세계에서 1억 다운로드를 돌파한 메루카리의 핵심 수익모델은 중고품 거래에 부과되는 10%의 수수료. 이 회사가 급성장한 전술적 배경에는 어린이 벼룩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어린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벼룩시장을 열어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학습과 환경교육 효과로 학부모들에게 가치소비의 이미지를 이끌어낸 것이 주효했다.

J리거였던 사키모토 사장도 2011년 중고 사업(SOU)에 도전해 성공했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중고 명품숍을 경매 플랫폼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SOU는 현재 메루카리와 함께 도쿄증권거래소 마더스에 상장한 중고 비즈니스 선도기업으로 꼽힌다. 연간 매출만 300억 엔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SOU의 비즈니스 모델은 두 가지 점에서 메루카리와 차이를 보인다. 첫 번째는 메루카리가 인터넷 기반 C2C 모델인 데 반해 SOU는 C2B 모델이다. 즉, 수거된 명품을 최종 소비자에게 팔지 않고 소매점에 경매로 파는 것이다. 회전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O2O 전략모델이다. 즉, 온라인 경매를 위해 70개의 오프라인 점포를 함께 운영한다.

SOU가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수거가 편하다. 효과적인 수거는 중고 비즈니스 성공의 핵심 요인이다. 다음으로는 구매자가 직접 만져볼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경매에 부칠 상품을 10일간 매장에 전시한다. 매도자의 접근성을 높이고 구매자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전략이다.

더욱 차별화된 전략은 상품의 스토리를 공유한다는 점이다. “결혼 예물로 받아서 분신처럼 아껴 썼다”거나 “본사 직영점에서 직접 샀는데, 마지막 제품이어서 가위바위보해서 이겼다”는 등의 스토리다. 이러한 스토리는 다음에 판매할 때도 그대로 전수돼 상품의 가치를 높인다. 즉, 추억을 함께 파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달라진 소비 행태가 흥미롭다. 수입차 판매 추이를 보면, 2019년 5월 현재 누적 판매순위 1위는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1만4880대), 2위는 BMW 5시리즈(5104대), 3위는 렉서스ES(4243대) 등이다. 2013년과 비교해 봤다. 6년 전에는 판매된 벤츠 전 차종의 합계가 1143대에 불과했다. BMW와 렉서스도 각각 792대와 341대 팔렸다. 국산차의 성장 속도와 비교하면 수입차 판매율이 현저하게 높아진 것이다.

수입 중고차 전시장 오픈행사 모습 ⓒ 연합뉴스
수입 중고차 전시장 오픈행사 모습 ⓒ 연합뉴스

시가총액 5조원대 기업도 등장

명품시장 주력 소비자가 20대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20대 명품 구매자 비중을 보면 2017년 2분기 5.4%에서 2019년 2분기 11.8%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구매 건수도 7.5배 성장했다. 이 두 가지 현상의 배경은 무엇일까. 그사이에 취업률이나 실질소득이 높아진 것은 아니다. 2020년 경제 전망이 밝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최근 한 독일인이 한국인의 자동차 사용습관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왜 한국인은 자동차를 사면 비닐을 뜯어내지 않고 불편하게 차를 이용할까.” 정답은 ’상품을 살 때 다시 팔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향후 판매할 중고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불편하지만 비닐을 뜯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필자의 생각에 확실히 답을 준 자료가 있다. 앞서 언급한 중고 플랫폼 메루카리와 미쓰비시종합연구소가 공동으로 프리마켓 앱(App) 이용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다. 질문 가운데 ‘신제품 구입 시 향후 매각을 의식하는가’라는 항목에서, 의류 구입 시 65%, 신품 화장품 구입 시 50%의 이용자가 “의식하고 산다”고 답했다.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는 향후 소비자 행동이 ‘소스(SAUSE)’ 소비로 바뀔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SAUSE란 Search(검색), Action(행동), Use(사용), Share(재판매), 그리고 Evaluation(평가)의 머리글자다. 실질소득이 줄고 있음에도 수입차나 명품 소비가 늘어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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