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 장인’ 허진호, 《천문》으로 ‘조선의 크리스마스’ 그려냈다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1 14:00
  • 호수 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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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 세종대왕과 장영실의 이야기 로맨스의 결로 풀어내

왕의 신분인 한 사람은 세상을 굽어봐야 했다. 그런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볼 수 있는 하늘이 좋았다. 또 한 사람은 노비로 태어난 탓에 마음대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만큼은 그가 아무리 고개를 들어 쳐다봐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이 근정전에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본다. 임금이 묻는다. “너의 별은 어디 있느냐?” 노비가 말한다. “소인은 별이 없사옵니다. 천출은 죽어서도 별이 될 수 없으니까요.” 이에 대한 임금의 반응. “저기 내 별(북극성) 옆에서 빛나는 별. 저게 오늘부터 네 별이다.” 이토록 애틋한 말을 건네는 이는 백성 위에 군림하는 군주의 국가가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정치를 꿈꾼 세종대왕이고, 그의 말에 감동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은 조선에 표준 시간을 선물한 장영실이다.

영화 《천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천문》의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것은 강력한 멜로 드라마

예상대로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최민식-한석규 두 배우의 연기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다. 신구의 연륜 넘치는 연기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천문》이 가장 놀라게 하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다. 그것은 허진호의 인장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행복》 등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장 깊고 넓고 애잔한 동시에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아아, 사랑이야’를 외치게 했던 멜로 장인 허진호 감독. 그는 세종대왕과 장영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로맨스 풍으로 풀어낸다. 《천문》을 보며 ‘아아, 사랑이야’를 읊조리게 될 줄이야.

《천문》의 시작은 세종실록에 실린 한 줄의 기록이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與: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해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했다.” 이것은 장영실에 대한 마지막 역사적 기록. 허진호 감독은 이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춰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장영실 삶의 빈틈을 브로맨스적 상상력으로 채워 나간다. 세종과 장영실 사이에 가로놓인 사회적 신분 차이와 마음껏 마음을 나누기엔 쉽지 않은 정치적 상황들이 ‘어떠한 장애 요소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멜로 드라마적 코드’에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부합한 모습으로 발현됐다.

실제로 《천문》에는 멜로 드라마적 대사와 시퀀스가 여럿 감지된다. 앞서 언급한 별자리를 함께 바라보는 근정전 시퀀스를 비롯, 별이 보고 싶다는 세종을 위해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별빛을 만들어 보이는 침소 시퀀스는 멜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감정적 밀도가 높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세종에게 “평생 전하 곁에 있는 것이옵니다”라고 말하는 장영실의 눈빛은 또 왜 이리 먹먹한가. 허진호 감독의 전작 제목을 끌어와, ‘궁중의 봄날은 간다’ ‘조선의 크리스마스’ ‘세종-장영실의 행복’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최민식-한석규, 20년 만의 만남

《천문》은 흥미로운 지점이 여러모로 많은 영화다. 일단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최민식-한석규 두 배우가 《쉬리》 이후 20년 만에 만나는 작품이란 점만으로도 시선을 잡아당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 이미지를 뿌리 깊게 내렸던 한석규와 《천문》의 한석규를 비교하며 지켜보는 건 《뿌리 깊은 나무》를 즐겨 본 팬들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걸쭉한 육두문자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인간미 넘치는 세종대왕을 한 차례 그렸던 한석규로서는 다시 같은 인물을 받아들인다는 게 적잖은 부담이었을 터. 그러나 한석규는 한석규다. 세종대왕이 품었을 또 다른 면모를 차별화해서 끄집어낸다.

관노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실력을 바탕으로 종3품 대호군까지 오른 장영실을 최민식이 연기했다는 점에서 타고난 그림 재주로 천민에서 궁중화가로 벼락출세했다가 홀연 사라진 《취화선》 장승업의 삶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자신의 몸을 극 안에서 악기처럼 다루기로 유명한 최민식은 이번에도 모든 감각을 열어 장영실을 받아들인 듯하다.

최민식-한석규 외에도 영의정을 연기한 신구의 존재감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자칫 악인으로 보일 수 있는 인물에 그만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세종대왕과 일대일 독대하는 장면에서 이 배우가 뿜어내는 기세는 새삼 경이롭다.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연기 구멍’이 없다는 게 장점인데, 그에 반해 편의적으로 그려진 캐릭터들이 있어 장점을 조금 갉아먹는다. 임원희, 윤제문, 김원해가 연기한 감초 캐릭터들은 세 배우의 개인기에 힘입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지만, 극 후반 분위기의 밀도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충무로 영화가 오랫동안 답습해 온 관성적인 인물 사용이다.

세종-장영실 사이에 흐르는 감정적 유대에 힘을 실은 《천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 위인의 업적을 소홀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역사 교과서에서 글과 그림으로 만났던 물시계인 자격루의 작동 원리와 천문기구 혼천의의 사용법 등이 스크린에 흥미롭게 재현된다. 극 초반이 장영실의 천재성에 주목해 달린다면, 후반 스토리를 견지하는 것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책과 트라우마다. 백성에게 글자를 주는 것. 그것은 단순히 표현 수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생각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믿었던 세종의 믿음과 신념이 멜로 드라마 결 안에서도 잘 살아 있다. 아버지 태종이 남긴 트라우마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군주로서의 모습 역시 놓치지 않는다.

영화 《나랏말싸미》《신기전》《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각각 세종대왕을 연기한 송강호·안성기·주지훈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CJ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나랏말싸미》《신기전》《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각각 세종대왕을 연기한 송강호·안성기·주지훈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CJ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세종대왕

역대 왕 중 가장 사랑받는 왕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니만큼 그의 이야기는 영화 안에서 자주 그려져 왔다. 지난 7월 개봉한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의 여러 업적 중 훈민정음 창제에 집중한 영화다. 송강호가 세종대왕을 맡아 개봉 전부터 큰 이목을 끌었으나, 역사 왜곡 논란에 발목이 잡혔다. 훈민정음 창제설 중 야사로 존재하는 신미대사 조력설을 반영한 것이 네티즌들의 큰 반감을 샀다. 영화에서 송강호는 현실에 발 디딘 인간적인 리더의 모습을 그렸으나, 영화 보이콧 속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신기전》에서는 배우 안성기가 세종대왕을 연기했다. 조선 최초의 로켓화포 신기전을 둘러싼 이야기로 한국영화 최초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촬영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주지훈 주연의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왕자의 거지’ 플롯이 세종대왕과 만난 발칙한 코미디물이다. 작정하고 웃음을 흘리는 주지훈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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