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인물-사회] '김지영'이 들썩이자 한국이 움찔했다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0 16:00
  • 호수 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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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중심에서 차별과 부조리에 맞선 '82년생 김지영'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 더없이 특별한 보통명사가 됐다. ‘82년생 김지영’은 한 명의 개인이 아닌 특정한 집단을 의미한다. 단순히 성(性)이 여성인 집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부조리를 직시하는 사람, 그에 맞서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들을 말한다. ‘김지영’은 올해 한국을 흔들었다.

현실의 김지영은 소설이나 영화 속 김지영보다 진취적이었다. 소설에서의 김지영은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보고 ‘맘충’이라고 수군대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다. 영화에서의 김지영은 그들에게 다가가 “저 아세요?”라고 물었다. 소설과 영화 사이의 공백은 3년. 그사이 현실의 김지영은 한발 더 나아갔다. 김지영은 이슈의 최전선에 서서 자기 목소리를 냈다.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4월11일 여성들은 환호했다. ⓒ EPA연합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4월11일 여성들은 환호했다. ⓒ EPA연합

버닝썬부터 조국까지…중심엔 김지영이 있다

김지영은 올해 한국 사회를 뒤흔든 ‘버닝썬 사태’ 중심에 있었다. 유명 연예인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약물을 이용한 성매매가 이뤄졌고,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은 오히려 뒤를 봐줬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사건 당사자인 가수 승리의 SNS가 단초가 되어 정준영과 최준영 등 다른 연예인의 성폭력 범죄들이 줄줄이 드러났다.

전국의 김지영들은 분노했다. 선망하던 연예인이 약물 강간과 불법적 성거래, 불법 성관계 영상 유출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이들을 먹여 살려온 게 여성 팬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모든 사태는 그야말로 엄청난 배신이었다. 뿔난 김지영들은 승리의 전 소속사 YG를 불매하는 것은 물론 폭력적인 성문화 전반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불법 성관계 영상 속 여성 연예인이 누구인지 찾으려던 시도를 꾸짖었으며 성매매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세태에 일침을 가했다. 일부는 버닝썬 사태의 핵심이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강압적 성문화에 있으니 이를 타파하자며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김학의·장자연 사건에도 김지영이 있었다. 김지영들은 십여 년 전 부실했던 조사로 묻힐 뻔했던 사건을 2019년 다시 끄집어냈다. 이번에도 사건의 당사자인 김학의 전 차관은 공소시효 만료로, 고(故) 장자연에게 성상납을 요구했다는 의혹을 받는 언론사 사장 등은 증거불충분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김지영의 저항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37개 단체는 12월18일 “본 사건의 진상은 아직까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다”며 김학의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중천은 물론 검찰 관계자를 직권남용죄로 고발했다. 이들은 “성폭력 사건의 사법 정의 실현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김지영은 조국 사태에서도 제 목소리를 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의 김지영에게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부정입학 의혹은 큰 상처였다. 20~40대 여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맘카페’ 등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조국 사태를 두고 설전이 이어졌다. 조 전 장관을 응원한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실망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이 집단은 문재인 정부의 견고한 지지층이었다. 그러나 조국 전 장관 일가가 교육이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리면서, 이 지지층의 이탈이 감지됐다. 실제 한국갤럽의 문재인 대통령 직무수행평가 여론조사에 따르면 조국 사태가 불거지기 전인 7월 19~29세 여성의 지지율은 61%에 달했으나 본격적으로 수사가 시작된 9월에는 52%로 크게 떨어졌다. 부정평가 역시 26%에서 31%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조 전 장관은 임명 35일 만에 법무부 장관직을 사퇴했다.

녹색당,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관계자들이 11월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고(故) 장자연 사건, 버닝썬 사건에 대해 경찰의 부실 편파 수사를 주장하며 민갑룡 경찰청장의 사직서 제출을 촉구하는 포돌이 등신대 발로 차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녹색당,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관계자들이 11월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고(故) 장자연 사건, 버닝썬 사건에 대해 경찰의 부실 편파 수사를 주장하며 민갑룡 경찰청장의 사직서 제출을 촉구하는 포돌이 등신대 발로 차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낙태죄 위헌, 대기업 여성 임원 약진

2019년의 김지영들이 늘 좌절했던 것만은 아니다. 낙태죄 위헌 판결이 나온 4월11일 김지영들은 환호했다. 낙태죄가 제정된 지 66년 만이었다.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날은 여성사(史)에 한 획을 그은 날로 기록됐다. 김지영들의 한(恨)인 ‘유리천장’이 군데군데 깨지기도 했다. LG, GS, 코오롱 등 대기업에서는 여성 임원들의 약진이 이어졌다. 특히 LG생활건강에선 30대 여성 2명이 상무가 됐는데, 그중 한 명은 남녀 통틀어 최연소인 34세였다.

김지영은 자신의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자꾸만 다른 사람으로 빙의하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김지영은 소설과 영화를 거쳐 현실에서 자신의 말을 찾아나가고 있다. 김지영은 이슈의 최전방에 서서 ‘김지영’을 외치는 중이다. 그 이면엔 희망이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은 “지영이 어머니보다는 지영이가, 지영이보다는 지영이 딸 아영이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영을 위한 지영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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