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아들’ 유승민의 ‘태극기 딜레마’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4 14:00
  • 호수 157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극기부대’ 국회 난입 파동에 “4+1이 원인”…새보수당 지도부와 다른 해석 내놔

“중도보수, 샤이보수, 셰임(shame)보수는 이제 당당하게 새로운 보수로 오십시오.” 바른미래당 비당권파 모임인 ‘변혁’이 새로운보수당(새보수당)으로 당명을 정한 가운데 리더 격인 유승민 의원은 12월12일 “낡은 보수를 과감하게 버리고 개혁보수의 길을 당당하게 가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자유한국당과 다른 노선을 걷겠다는 전략으로 읽혔다. 그러나 최근 유 의원의 행보를 두고 당 안팎에서 ‘새로운 보수가, 새롭지 않다’는 비판이 흘러나온다. 패스트트랙의 극한 대치 정국에서 한국당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등 대안 보수당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낡은 보수’와 작별을 고한 유 의원이 정작 ‘강성 보수’의 심장부인 대구 출마를 재확인하면서, 정치적 딜레마에 빠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이 12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 비전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유승민 새로운보수당 인재영입위원장이 12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 비전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대구의 아들, ‘대구 정서’ 외면키 어려워”

12월16일 한국당이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를 이어가던 국회 안에 한국당 지지자들이 선거법 개정 반대를 주장하며 대거 난입했다. 국회 안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인파로 아수라장이 됐다. 군중 가운데 선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여러분 들어오신 거 이미 승리한 겁니다! 이긴 겁니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음 날 새보수당의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회가 폭력과 욕설을 자행하는 과격한 ‘근육보수’에게 유린당했다”며 황 대표와 태극기부대를 힐난했다. ‘새로운 보수당’은 ‘낡은 보수당’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이어 12월18일에는 이준석 새보수당 창당준비위 수석부위원장이 한국당 비판에 가세했다. 이 부위원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총선 앞두고 왜 자꾸 이런 판을 벌이느냐, 잔치 앞두고 위험한 선택들을 하고 있다”며 “황교안 대표가 다른 세력과 연대 관계를 통해 동원력을 확대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사실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동원 가능성보다도 관리 가능성까지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새보수당의 주요 인사들이 한국당 비판 행렬에 가세했지만, 유 의원만큼은 미묘하게 다른 입장을 내놨다. 그는 한국당이나 ‘태극기부대’가 아닌 여야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가 국회 난입 사태의 원인이라고 못 박으며, 비판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유 의원은 12월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보수당 창당준비위원회 비전회의에서 “4월에 패스트트랙을 시작할 때 불법 사·보임으로 시작해 최근 4+1이라는 법적 근거가 없는 모임에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 게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했다. 이어 “원흉은 민주당이고, 거기에 가담한 게 평화당·정의당·대안신당, 그리고 부끄럽지만 바른미래당 일부 의원이 있다”며 “이런 분들이 국회에서 퇴출당해야 국회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했다.

“새로운 보수는 낡은 보수를 과감히 버리겠다”던 유승민 의원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여의도 정가에서는 정작 그가 말한 ‘과감성’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연일 ‘우회전’만 하고 있는 한국당과 별로 차별화되지 않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낡은 보수’의 대표 세력으로 꼽히는 ‘태극기부대’를 포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유 의원이 말하는 개혁보수의 방향성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치권에서는 유 의원이 내년 총선에서 이른바 ‘친박의 본거지’로 불리는 대구 재출마를 결심한 게 자신의 운신 폭을 좁히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유 의원은 12월8일 국회에서 열린 ‘변화와 혁신’ 창당발기인 대회에 참석해 “광주의 딸 권은희 의원은 광주에서, 부산의 아들 하태경 의원은 부산에서, 제일 어려운 대구의 아들 유승민은 대구에서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유 의원이 내년 4·15 총선에서 한때 떠돌던 수도권 출마설을 일축한 채 자신의 지역구를 그대로 지키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다. 4선인 유 의원은 대구 동구을에서 17·18·19·20대 내리 당선됐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며 당시 새누리당(한국당의 전신)을 탈당한 후 대구 지역 일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배신자’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같은 정서를 반전시키는 게 유 의원의 숙제다. 새 정치를 말한 유 의원이 ‘대구의 아들’이란 다소 낡은 수사를 꺼내든 것도 이 때문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집회 참가자들이 12월16일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공수처법·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와 집회 참가자들이 12월16일 국회 본관 앞에서 열린 ‘공수처법·선거법 날치기 저지 규탄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총선이냐 대선이냐…“통합 타이밍 고민”

정치평론가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유 의원은 현재 총선을 앞두고 기로에 서 있다. 신념을 지키느냐, 당선 확률을 높일 것인가를 두고 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며 “쉽게 말해 대구의 정서는 곧 ‘태극기 정서’와 다를 바가 없다. 만약 대구에서 출마를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국회 난입 사태 등의) 책임을 민주당으로 돌려야만 한다. 여기서 ‘태극기부대’를 비판한다는 것은 자신의 출마 지역구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유 의원이 (새로운 보수라는) 창당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대구를 과감하게 버리고 서울 등 험지로 나서야 한다. 그러나 (대구가) 자신의 오랜 지역구이기에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딜레마에 빠진 유 의원이 한국당과 손잡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실제 ‘이대로 총선을 완주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한국당 내부에 팽배한 것으로 전해진다. ‘낡은 보수’와는 이별을 선언했지만 보수 유권자의 표심을 가져와야 하는 유 의원과, 당의 외연을 넓히고 싶어 하는 한국당의 니즈(needs)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이다. ‘타도 문재인 정권’이라는 큰 깃발 아래, 새보수당과 한국당이 총선 전후로 타협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당 한 중진 의원실 관계자는 “유 의원도 결국은 ‘보수 DNA’를 갖고 있는 TK 정치인이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란 게 기존 보수 유권자들의 표심을 외면하겠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라며 “총선이 아니더라도 다음 대선을 위해 통합보수 정당 창당은 불가피하다. 아마 (대선에) 가까워질수록 (유 의원도) 통합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