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별들 떠난 재계 앞길은 ‘비포장도로’
  • 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mw@sisajournal-e.com)
  • 승인 2019.12.26 10:00
  • 호수 1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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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환경 변화로 ‘제2 전성기’ 힘들 전망…“기업가 정신 다시 필요한 시점”

대한민국 산업 부흥을 이끌었던 재계 거목들이 올 한 해 한꺼번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이 세상을 떴고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전 세대 오너들과 함께 그룹 부흥을 이끌었던 조성진 LG 부회장, 우유철 현대로템 부회장, 석태수 대한항공 부회장도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 총괄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부터) 등 각 그룹에서 ‘세대 교체’된 젊은 총수 4인이 올해 초 신년회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 총괄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부터) 등 각 그룹에서 ‘세대 교체’된 젊은 총수 4인이 올해 초 신년회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LG·GS·한진그룹 등 세대 교체

새로운 인물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갔다. 구광모 LG 회장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원태 대한항공 회장 역시 조양호 회장 별세 이후 주총을 거쳐 확실하게 대한항공의 오너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경연 전면에 나서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기존 관행들을 급속도로 바꿔나가고 있다.

아직 경영권을 잡기엔 갈 길이 멀지만 오너 3세들의 잰걸음도 눈에 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큐셀 부사장은 올해 성과를 인정받아 승진하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이재현 CJ 회장이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과 이경후 CJENM 상무에게 CJ 주식 184만 주를 증여한 것도 관심을 끄는 부분이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물갈이가 이뤄지고 있지만 세대 교체를 이룬 기업들이 마냥 장밋빛 미래를 그리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분석이다. 선대 때처럼 빈손으로 시작해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경영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기업을 더 키우는 것 자체가 힘든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우선 대외적 변수가 커졌다. 무엇보다 주주들의 입김이 세졌다. 주주들은 지분을 바탕으로 세를 모아 총수들과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대표적 예가 조원태 회장과 KCGI의 힘겨루기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조양호 회장 때에 비해 항공업계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란 점도 있지만, 조 회장은 당장 KCGI와의 경영권 문제를 해결하고 주주를 만족시키며 ‘주주 행동주의’에 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이와 더불어 향후 기업들은 대기업들의 지분을 늘리며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려는 국민연금의 눈치도 봐야 한다. 국민연금을 주요 주주로 둔 한 기업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선 주요 결정을 함에 있어 국민연금의 생각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고 전했다.

선대 때처럼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마냥 기대할 수 없게 됐다는 점도 달라진 경영환경 변수 중 하나다. 대한민국 대기업이 지금처럼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들의 노력도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기업을 물심양면 밀어준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 이제 이 같은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오히려 국토부의 진에어 제재를 둘러싼 논란처럼 정부와 기업이 갈등을 보이는 경우가 늘었다.

기업 입장에선 새롭게 바뀌는 분위기에 적응해 가면서도 정부와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가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며 “과거 용인되던 것들이 범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해 가면서도 정부의 요구를 맞춰가야 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경유착? 이젠 옛날 이야기

패러다임 변화로 세계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삼성전자, 현대차 등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국내 기업들도 안심하기 힘든 처지가 됐다. 국내 제도 및 법적 환경 때문에 산업구조 전환이 쉽지 않다는 평가다. ‘타다’ 서비스를 하다가 범법자가 될 위기에 처한 이재웅 ‘쏘카’ 대표가 그 방증이다.

‘기업가 정신’이 이미 실종하다시피 했다는 점도 향후 세대 교체를 이룬 한국 기업들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게 하는 부분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김우중 회장의 저서에 담긴 내용들은 지금 세대에겐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돼 버렸다. 조성진 LG 부회장과 같은 월급쟁이 신화도 점점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새로운 산업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기업들엔 다시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전했다. 최근 취업 포털사이트 사람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 직장인 10명 중 4명은 승진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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