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드라마 트렌드 보면 내년이 보인다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2.28 12:00
  • 호수 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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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OTT 시대에 맞서는 드라마 플랫폼들의 전쟁

2019년에도 다양한 드라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은 tvN 《아스달 연대기》다. 이 작품을 쓴 김영현·박상연 작가는 과거 퓨전 사극부터 현재의 신세대 사극까지를 이끌어온 대표 사극 작가들이다.

이들이 역사가 아닌 선사(先史)로 눈을 돌렸다는 건 굉장히 상징적이다. 여기엔 선사가 갖는 글로벌한 보편성(문화인류학적 접근이 담겨 있다)과 역사적 사실에서 훌쩍 벗어나 온전한 상상의 왕국을 세우려는 야심이 엿보인다. 지금껏 상상할 수 없었던 수백억원에 이르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의 투자를 받아 글로벌하게 방영됐다는 사실은 우리 드라마가 이젠 글로벌 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아스달 연대기》는 완전한 성공이라고도 완전한 실패라고도 말하기 어렵다. 3개 파트로 나뉘어 2개 파트가 먼저 방영될 때까지만 해도 너무 낯선 세계에 시청자들이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휴지기를 가진 후 방영된 파트3는 좀 더 본격화된 이야기로 이 연대기에 빠져들게 했고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감도 높였다.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 tvNSBS 드라마 《배가본드》 ⓒ SBS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 tvN

역사가 아닌 선사와 상상력, 국내만이 아닌 글로벌한 보편성, 해외 투자를 통한 글로벌 유통 등 《아스달 연대기》는 여러모로 현재 우리 드라마가 마주하게 된 새 환경을 떠올리게 한다. 글로벌 환경 속에서 과거 같은 우물 안 개구리로는 버텨낼 수 없는 상황이다. 이미 국내에 들어와 저변을 넓히고 있는 넷플릭스 같은 OTT 콘텐츠들이 우리 대중의 입맛과 눈높이를 바꿔놓고 있다. 이에 SBS 《배가본드》 같은 대작들이 만들어지고 JTBC 《보좌관》, MBC 《검법남녀》 같은 본격 시즌제를 겨냥한 작품들도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됐다.

결국 새해에도 이처럼 글로벌한 대작 프로젝트들이 시즌제를 장착하고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투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여전히 국내 소비층이 남아 있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들은 계속 쏟아져 나오겠지만 타 장르와의 신선한 퓨전이 아니면 주목받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워야 하고 글로벌 감성에 더 다가가는 작품이어야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 ⓒ tvNSBS 드라마 《배가본드》 ⓒ SBS
SBS 드라마 《배가본드》 ⓒ SBS

《동백꽃 필 무렵》이 보여준 우리만의 가능성

하지만 글로벌과 보편성을 지향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올해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 KBS 《동백꽃 필 무렵》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이 작품은 옹산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에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스릴러를 엮은 독특한 시도를 했다. 그런데 특유의 구수한 사투리나 토속적인 맛에서 나오는 웃음은 사실 글로벌의 정반대인 로컬의 특징이다. 독보적인 23.8% 시청률(닐슨 코리아)을 냈고 화제성도 단연 으뜸이었다. 넷플릭스 측에 의하면 이 드라마는 해외에서도 괜찮은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단순한 보편성만이 아니라 로컬이 오히려 글로벌한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동백꽃 필 무렵》은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이기도 했다. 지상파 드라마들이 tvN과 JTBC 같은 비지상파 드라마에 밀려 존폐 위기에 몰려 있는 상황에서 KBS 드라마는 《동백꽃 필 무렵》으로 기사회생했다. 성공 보증수표처럼 인식되었던 tvN 드라마들은 《호텔 델루나》 《왕이 된 남자》 같은 성공작이나 가능성을 보인 《쌉니다 천리마마트》 같은 드라마도 있었지만 《어비스》 《위대한 쇼》 《유령을 잡아라》 《진심이 닿다》 《그녀의 사생활》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청일전자 미쓰리》 등이 연달아 고전하며 전체 승률을 떨어뜨렸다.

반면 지상파들은 KBS 《동백꽃 필 무렵》을 필두로 《닥터 프리즈너》, MBC 《검법남녀2》 《봄밤》, SBS 《배가본드》 《VIP》 같은 작품들이 선전했다. 물론 지상파들도 많은 실패작이 등장했지만 기세에서 비지상파에 밀리지 않을 정도의 드라마들을 내놨다고 볼 수 있다.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KBS
KBS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KBS

혼전의 편성 전쟁, 과거 틀은 이제 버려야

결국 《동백꽃 필 무렵》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글로벌 보편성을 지향하는 드라마들과 함께 로컬의 맛을 극대화해 그 차별성으로 해외에서도 주목받게 하는 전통적인 한류 드라마들 역시 새해 틈새를 뚫고 나올 가능성이 충분하다. 시청률에서는 실패했지만 독특한 세계로 화제를 일으켰던 MBC 《어쩌다 발견한 하루》처럼 작아도 작품의 완성도와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틈새 드라마들이 의외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올해 특히 눈에 띄는 건 드라마 편성 시간대가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지상파들이 밤 10시로 줄곧 이어왔던 주중 드라마 편성은 tvN과 JTBC의 30분 앞당긴 9시30분 편성으로 인해 교란을 받게 됐다. 이에 MBC가 9시로 드라마 편성 시간을 바꿈으로써 혼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물론 MBC의 9시대 드라마 방영은 타 지상파들인 SBS나 KBS에 그리 실이 되는 선택은 아니었다. 지상파 3사가 경쟁하는 시대에서 지상파와 비지상파가 경쟁하는 구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상파 3사는 최근 광고 실적 감소 등으로 출혈경쟁을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MBC와 SBS는 한시적으로 드라마 대신 그 시간대에 예능 프로그램을 편성하며 ‘선택과 집중’을 도모하고 있다. 반면 tvN과 JTBC는 계속 드라마 편성 시간대를 주중, 주말까지 늘려가면서 확고한 드라마 헤게모니를 잡으려 하고 있다. 특히 tvN과 JTBC는 넷플릭스와 새 계약을 맺어 합작과 글로벌 유통을 이어갈 계획이고 티빙을 바탕으로 하는 OTT 또한 준비 중이다. 여기에 맞서 지상파들도 이미 웨이브라는 통합 OTT를 열고 기존 지상파 플랫폼의 한계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흥미로운 건 SBS가 새해부터 월화드라마를 밤 9시40분부터 시작해 총 80분간 편성하겠다고 발표한 사실이다. 이는 기존 지상파의 틀이 아니라 비지상파의 틀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이다. 결국 방송 시간대나 시간 모두 이제 과거 틀을 벗어버리는 상황이 예고되고 있다. 시청자들로서는 좀 더 내실 있는 드라마를 볼 수 있어 좋지만, 제작자들로서는 그만큼 치열해진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점점 치열해지는 지상파·비지상파 드라마들의 경쟁은 더 좋은 양질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게 하는 호재가 될까. 새해가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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