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 바꿀 ‘포스트 386’ X세대 정치인 시대 열렸다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12.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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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체 바람’으로 청년 정치 넓어져…사회 다양성 담아내야

“386세대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의 뜻을 담고 있는 ‘386’은 8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의 거센 물결을 만들어냈던 ‘성난 젊은이들’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2000년 벽두, 그들이 다시 시민 선거혁명의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고 있다.” 2000년 2월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다. 구구절절 극찬 일색이다. 이토록 찬사를 듣던 386세대가 왜 20년 만에 청산의 중심에 섰을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19년 하반기 국내 서점가를 강타한 이철승 서강대 교수(사회학)의 《불평등의 세대》에는 독점화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 같은 세대론적 접근은 10여 년 전 출간된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공저) 이후 오랜만이다.

세대론적 접근은 아직 한국 사회학계에선 소수의견에 불과하다. 《불평등의 세대》에서 저자는 “386세대는 20년에 걸쳐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랫세대의 성장을 억압했다. 정치권과 노동시장에서 최고위직을 장기 독점하고 있다” 주장했다. 이후 386세대 비판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김정훈 CBS 기자 등 3명이 함께 쓴 《386 세대유감》도 전체적인 논조는 《불평등의 세대》와 같다. 학연·지연·혈연 네트워크가 386세대 속에서 얽히고설키며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게 요지다.

“초심을 잃었다.” 386세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이 10억원이 넘는 돈을 은행에서 빌려 재개발이 예정된 상가를 사들이는 대신 자신의 거처는 무료로 제공되는 공관으로 옮기는 모습에서 대중은 386세대의 이중성을 엿봤다. 대통령을 꿈꾸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아무 부끄럼 없이 성폭력을 저지르는 행태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조국 전 법무장관 인사 논란이다. 각종 사회 부조리에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내던 조 전 장관은 정작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졌을 땐 아무 대응도 할 수 없었다. 이를 두고 혹자는 ‘허울뿐인 386의 허상이 벗겨진 순간’이라고 말한다. 조국 사태에 대한 2030 세대의 비판은 2006년 이해찬 국무총리의 ‘3·1절 골프’ 파문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보수진영은 이 총리에 대해 “자기 자식은 1년에 수천만원 소요되는 고급 유학을 보내고 실업고에 찾아가 양극화 선동을 하는 이율배반적 강남 좌파”라고 비판했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지난 12월5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변혁 비상행동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가 지난 12월5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변혁 비상행동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386 정치, 왜 ‘초심 잃었다’ 비판받나

그런 면에서 우석훈 박사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대학 국유화를 쟁취한 뒤 다음 단계로 진화했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우리 386은 대학 개혁에 대해 아무런 청사진이나 의미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벌사회를 더욱 강화하며 교육 엘리트주의를 강화시키는 일종의 역사에 대한 배신을 행한 세대다. 이 세대가 아이들을 낳게 됐을 때 우리나라에서 원정출산이라는 것이 나타났고,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조기교육 붐이 일어났다.” 김대중 정부에서 비서실장과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박지원 의원은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이 386세대 정치인들을 정치권에 입문시키면서 ‘남들이 양주를 마시더라도 너희는(386세대 정치인) 소주를 마셔야 한다. 너희들은 스스로에게 더욱 엄격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386세대 정치인의 도덕적 결함을 일찍부터 예견했다”고 밝혔다.

사회학계에선 386세대 이후를 지칭하는 말로 X세대, IMF세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들이 그 전 세대와 다른 점은 정치적 이슈 및 연공서열에 민감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한총련(한국대학생총연합회)라는 거대 학생조직을 탄생시켰지만,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만큼 사회적으로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 전 세대들이 경제적 풍요 속에 양질의 직업을 선택한 것과 달리,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거나 취업한 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경험했다. 또 대학에 들어갈 때는 아날로그를 경험했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모바일과 웹(Web)이라는 디지털 신문명을 터득한 세대다. 디지털 문명의 발현은 소비의 팽창으로 이어져 돈 모아 집 장만하기보다 은행 돈으로 부동산 투자에 나서는 세태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X세대들부터다.

그렇다면 정치권은 어땠을까. 최근 386세대 독점화가 논란이 된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아직까지 우리 정치권에서 X세대 정치인들이 설 자리는 마땅치 않다. 총선 때마다 주요 정당들이 비례대표의 일정 부분을 청년 몫으로 돌리고 있지만, 대부분 재선에 실패하며 하나둘 정치권에서 사라져 갔다. 일각에선 이러한 준비되지 않은 정치 신인들의 무리한 등판으로 ‘정치 낭인’만 늘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역대 총선에서 세대교체 비율은 적은 수가 아니다. 단순히 숫자로만 보면 세대교체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일단 초선 의원 비율이 40~50%를 오간다. 이는 되레 정치 경험이 풍부한 중진급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2011년 10월 국회보에 따르면 60세 이상 의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 40%(하원 기준), 프랑스 49.6%(하원 기준), 영국 17.7%였다. 글을 쓴 윤원중 전 의원은 “18대 국회의 경우 60세 이상이 20.7%였다”면서 “더 이상 공천 과정에서 비대안적인 인물교체론이나 세대교체론이 패션이나 유행처럼 취급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03년 8월10일 신계륜 민주당 의원(가운데) 등 신진 정치인들이 남북 경제협력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뱅크이미지
2003년 8월10일 신계륜 민주당 의원(가운데) 등 신진 정치인들이 남북 경제협력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뱅크이미지

총선 때마다 청년 정치인 쏟아졌지만 역할 미미

20대 국회에서 X세대 정치인은 나름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원내대표(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가 나왔는가 하면 박주민·김해영 민주당 의원은 선출직 최고위원에 뽑히며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이는 눈에 드러나는 것일 뿐, 국회 내 활동은 기존 386세대 정치인들에게 크게 밀린다는 평가가 많다. X세대 정치인이 386세대처럼 정치권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일단 386세대는 강한 응집력을 통해 정치권에 나름 자리를 잡았다. 그 전 세대가 상도동·동교동과 같은 계파정치를 통해 정치권에 입문한 것과 달리 이들은 사회 개혁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반면 X세대 정치인은 충분히 뿌리내릴 자양분이 없다. 20대 총선에서 부산 사하을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오창석씨는 2019년에 펴낸 책 《스물아홉, 취업 대신 출마하다》에서 자신과 같은 X세대 정치인의 한계를 △자본 △전문성 △조직 장악력 부족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아예 386 이후 세대가 정치세력화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386처럼 강력한 결사체를 만들기 힘들 거라는 지적도 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민주화운동 출신 세대(386세대)가 집권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강해 제도정치권에 대거 들어간 반면 그 이후 세대는 제도정치에 들어가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과거 ‘386’과 같은 정치세력이 등장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세대론적으로 접근한 여러 논문들은 공통적으로 X세대의 정치성향이 진보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2002년 대선부터 우리 정치 현장에서 지역구도가 약해지고 연령별 이념지향이 극명하게 나눠지고 있는 것을 볼 때 ‘포스트 386’의 정치적 성향은 진보적 성격이 강하다. 신 교수는 “2040 세대가 이념지향보다 복지국가 등 사회운영 방식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때 정당 간 이념 갈등은 앞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돈·전문성·조직 장악력 없는 ‘X세대 정치인’

그렇다면 다음 선거는 어떤 모습을 띨까.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선거구제 개편이 관건이지만, 다양한 세대·계층의 원내 진입은 불가피하다. 지금과 같은 소선거구 1위대표제 체제에서 X세대 정치인의 원내 진입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소선거구 1위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선 공통적으로 겪는 바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녹색당 등 진보진영의 군소정당이 양성평등과 반려견, 환경 등 생활형 이슈로 유권자의 이목을 끈 것은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X세대 정치인들은 그 윗세대인 386세대에 비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386세대가 대학 시절부터 조직화된 사회참여활동에 적극적이었다면, 이후 세대는 이러한 성향이 비교적 덜하기 때문이다. 이현우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는 “386 이후 정치세대는 자신이 가진 가치 지향성을 시민사회와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정치적 역량이 판가름 날 것”이라면서 “생활정치나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가 점차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혹자는 ‘포스트 386’으로 불리는 X세대를 가리켜 ‘개인주의적 개방세대’라고 평가한다. 이원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10년 치 한국일반사회조사(KGSS)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70년대 이후 출생 세대는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이었지만 북한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이라면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의 부정적 평가가 많아진 것은 무조건적인 북한에 대한 지지에 공정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이 386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수적 우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연공서열에 길들여진 우리 정치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정치 개혁과 진보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당내 민주화에 침묵하는 지금의 386세대 정치인들과 결이 다른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도 당내 제도 개혁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과거 386을 연상시키는 의원들 상당수가 민주당에 포진해 있는데, 문제는 민주당이 여당으로 있으면서 이들의 장기가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386세대 정치인들이 민주화, 탈권위주의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듯 그 이후 세대도 다원화되고 물질화된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를 발굴해야 한다. 불평등, 환경 등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기득권’ 386, 20년 전엔 신진 세력 기대 한 몸에 받아

16대 총선을 앞둔 1999년 정치, 경제,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사상 처음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가운데, 국가경제는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라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시기적으로도 ‘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정치권에서도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화두가 됐다. 발단은 16대 총선을 앞두고 총선연대라는 시민단체 주도의 낙천운동이 공식화하면서다. 국민회의를 깨고 새천년민주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어 정권교체에 성공한 당시 김대중 정부는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차원에서 1987년 직선제 민주화 투쟁 시절 전면에 나선 운동권 출신 인사들을 대거 정치권에 끌어들였다. 그때 들어온 인사들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지도부 출신인 이인영(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우상호(1기 전대협 부의장·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의원과 오영식 전 코레일 사장(2기 전대협 의장·전 연세대 총학생회장),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3기 전대협 의장·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다. 당시 시민사회는 386 정치인들이 누구보다 높은 정치의식과 응집력을 갖고 있다며, 정치권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 것으로 내다봤다.

그간 한국 근현대 정치사에서 세대교체는 적잖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16대 때도 예외는 아니다. 기성 정치인들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이러한 노골적인 386세대 예찬론에 “너희들끼리 잘해 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동교동계의 거물급 정치인인 고 김상현 전 의원은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국회에 들어가겠다”고 반발할 정도였다.

ⓒ 뉴스뱅크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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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욱 중앙대 교수 인터뷰>

“386 기득권화는 검증되지 않은 ‘일베’성 담론”

“‘386’ 담론은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의 구조적인 문제를 ‘386’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권이 문제면 정권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전 언론이 ‘386’이라는 모호한 대상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러한 386 일반화의 오류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신 교수는 “올해(2019년) 7월에 출간된 《386 세대유감》에서 저자들은 ‘386세대는 헬조선을 만든 세대’ ‘사다리를 걷어찬 세대’ ‘무능한 꼰대 집단’이라고 비판하는데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서 소득불평등의 급격한 악화는 세대 간 불평등이 아니라 세대 내 계급불평등의 증가에 따른 것이며, 더구나 장년층과 노년층으로 갈수록 세대 내 계급불평등이 더 악화됐다는 연구 논문을 참고로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386’이라는 하나의 세대 전체가 모든 사회적 기득권을 독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 교수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논문 《‘386’ 담론의 계보와 정치적 의미론, 1990-2019》를 지난 12월20일 고려대에서 열린 한국사회학회 2019년 정기 사회학대회에서 발표했다.

신 교수는 “2018년까지 대부분의 386 담론은 80년대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인 그룹에 대한 관심, 기대, 견제, 비판이 주된 내용이었으나 2019년에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거나 진보적 가치를 추구해 온 사회세력 전체를 문제시하는 의미론적 전환이 보수·진보 언론 가릴 것 없이 확산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386이라는 단어와 함께 ‘불평등’ ‘꼰대’ ‘청년’ ‘분노’라는 언어가 매우 빈번히 등장하면서 좌파와 진보에 대한 이념적 공격 성격이 강해졌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를 가리켜 “386 담론의 일베(극우 성향 사이트인 일간베스트)화”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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