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선의 시시비비] 문재인 정부 앞에 놓인 ‘박근혜의 덫’
  • 유창선 시사평론가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9.12.30 14:00
  • 호수 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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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사유화 비판한 文 정부도 靑 운영 방식 구태에서 못 벗어나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의 기치를 들고 집권했다. 실제로 집권 초반기 문재인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적폐에 대한 심판과 단죄였다. 권력의 유한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국정을 농단하고 사유화했던 많은 이가 적폐로 지목되면서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갔다. 국민들은 그 같은 역사적 심판에 박수를 보냈고 그 힘으로 문재인 정부의 집권 초반기는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 시기 문재인 정부의 모습은 정의의 칼을 뽑아 불의를 단죄하는 심판자였다.

그런 문재인 정부를 박근혜 정부와 비교한다면 당사자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성을 낼지 모른다. 그래서 야당이나 언론이 ‘내로남불’을 말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고 항변하던 것이 이제까지의 광경이었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광경들은 국민에게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게 하는 ‘박근혜 데자뷔’가 되고 있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 수사,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는 과거 박근혜 정부 문제를 답습한다는 점에서 여권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 청와대 제공
김기현 전 울산시장 수사,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는 과거 박근혜 정부 문제를 답습한다는 점에서 여권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 청와대 제공

靑 민정수석실, 여전히 막강한 권력 휘둘러

최근 정국의 뇌관으로 떠오른 것은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와 김기현 전 울산시장 ‘하명 수사’를 둘러싼 의혹들이다. 여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우병우 민정수석이 국정농단 방조, 블랙리스트 작성 등의 혐의로 기소되면서 민정수석실의 민낯이 드러난 바 있다. 민정수석실의 과도한 권력집중 문제는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시정되지 못한 채 민정수석실은 적폐 청산의 기조 속에서 권력 위의 권력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조국 민정수석이 이끌었던 민정수석실은 인사검증과 직무감찰 같은 고유의 업무는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내부 기강의 해이를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는 집권세력 내부에 민정수석실이라는 권력을 견제할 다른 기능이 부재한 탓이기도 했다. 민정수석실 업무는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자체 감찰을 하도록 돼 있지만,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내부의 상호 견제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더욱이 특별감찰관 공석 상황이 장기화하면서 대통령 주변 인사들에 대한 감찰 기능이 부재한 상황이 초래됐다. 현재 검찰 수사를 둘러싸고 공방이 펼쳐지고 있는 이유는 민정수석실 업무의 권한과 한계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동안의 청와대 운영 방식을 생각하면 언젠가는 터져 나올 문제였다. 민정수석실이 객관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작동되지 못한 상태에서 ‘잘 알던 사람들끼리’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해 온 결과가 오늘 드러나고 있는 난맥으로 보인다.

‘감찰 무마’와 ‘하명 수사’라는 두 가지 의혹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의 주변 인사, 더 나아가 문 대통령에게까지 의심이 확대될 수 있는 내용의 것이기 때문이다.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은 유재수 감찰을 놓고 원칙대로 수사 의뢰 입장을 표명했지만, “조국 전 장관이 주변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온다고 한 뒤 감찰 중단을 지시했다”는 취지로 검찰에서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비리 혐의가 드러난 유재수 구명을 위해 조국 수석에게 전화를 건 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가 규명돼야 할 일이다. 또한 ‘하명 수사’ 의혹과 관련해서는 문 대통령의 선거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다.

당초 ‘하명 수사’ 의혹은 6·13 지방선거 당시 청와대가 야당 후보인 김기현 전 울산시장을 낙선시키기 위해 경찰에 수사를 하명했다는 내용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제는 청와대가 문 대통령의 친구인 민주당 송철호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공약 지원, 여당 내 경쟁후보 불출마 회유 등 선거 개입을 했다는 의혹으로까지 번진 상태다.

현직 대통령의 공천 개입 혹은 선거 개입 여부가 민감한 사안이 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천에 개입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2016년 4·13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여론조사 등을 벌인 이유가 비박(非朴·비박근혜계) 후보를 배제하고 친박(親朴·친박근혜계)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박 전 대통령의 인식과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인 실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해도 여론조사나 선거운동 기획은 대통령의 명시적·묵시적 승인이나 지시 아래 이뤄진 것으로 법원은 판단한 것이다. 야당들이 문 대통령의 개입 여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법원의 그 같은 판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송병기 업무수첩과 안종범 수첩은 닮은꼴?

공교롭게도 국정 농단 사건 때의 ‘안종범 수첩’을 떠올리게 하는 ‘송병기 업무수첩’이 등장했다. 이 수첩에는 경선과 관련해 ‘VIP가 실장 통해서 출마 요청’ ‘내부 경선하면 송철호 불리’ ‘중앙당과 BH→임동호 제거, 송장관 체제로 정리’ ‘최인호 曰(왈) 조국이 임동호 움직일 카드 있다고 말했다’ 등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메모에 따르면 송철호 시장의 출마는 문 대통령의 뜻이었고, 청와대와 민주당이 개입해 다른 경쟁자들을 포기시키는 교통정리를 해 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파문이 커지자 수첩의 작성자인 송 부시장은 “일기 형식의 메모장에 불과하다”고 해명하고 나섰지만, 앞으로 법원이 이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대법원에서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내용에 한해 인정된 바 있다. ‘송병기 업무수첩’ 또한 송 부시장이 직접 들은 내용을 기록했다면 유죄의 근거로 판단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송병기 업무수첩’은 아직 살아 있는 폭탄이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에는 민정수석실이 ‘우병우 마음대로인 권력’으로만 자리할 뿐, 제 역할을 못했던 책임이 지적받았다. 지금 문재인 정부를 둘러싼 의혹마다 민정수석실이 등장하고 있다. 제도적 장치가 아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들 간의 믿음과 의리로 조직을 운영해 온 탓이다. 민정수석실이 권력 위의 권력으로 자리하는 지금의 틀이 지속되는 한, 민정수석실의 권한과 책임을 둘러싼 법적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만큼 엄격한 운영에 대한 자기 긴장이 요구된다. 그러나 청와대는 검찰 수사에 날을 세우며 성난 모습부터 보여주고 있다. ‘감찰 무마’ 의혹에 대해서도 “청와대가 이러한 정무적 판단과 결정을 일일이 검찰의 허락을 받고 일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입장”이라며 불쾌한 반응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동안 논란거리가 생길 때마다 그랬듯이, 청와대 또한 전체적인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사자들의 해명만 갖고 사안을 판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내걸고 국민의 지지를 모아 집권했던 정부다. 그런 정부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의 불법적 행위들과 비슷한 일들로 의혹을 받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허위’라는 말만으로 일축하기에는 드러난 여러 정황들이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다. 이럴 때 어떤 태도가 자신들을 철석같이 믿었던 국민들에 대한 도리인지 생각할 때다. 누구에게나 선의는 있다. 그러나 선의가 모든 행위를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은 법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는 사회적 믿음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 여기에 성역이 있을 수 없다. 자신들끼리가 아닌 국민과의 의리를 우선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옳은 태도일 것이다. 자신들 내부의 허물이나 과오가 발견됐을 때 박근혜 권력과는 다른 태도로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모습이 아쉽다. 민심을 좌우했던 것은 권력 행사에 잘못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불통의 태도에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선 정권들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망각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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