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 훔친 용의자 2명 검거
  • 호남취재본부 신명철 기자 (sisa618@sisajournal.com)
  • 승인 2019.12.3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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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범행 4시간만에 충남 논산 용의자 집에서 체포
초유의 성금 도난 소식에 지역사회 ‘발칵’ 뒤집혀
“올해로 20년째, 전주의 자랑인데…”시민들 탄식

해마다 세밑 추위를 녹여주던 전북 전주시 노송동의 ‘얼굴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훔쳐간 용의자 2명이 붙잡혔다. 범행 4시간여 만이다. 전주완산경찰서는 30일 오후 2시30분쯤 충남 지역에서 특수절도 혐의로 A(35)씨와 B(34)씨를 긴급 체포해 전주로 압송 중이다.

올해로 20년째 선행을 베풀고 있는 전주 ‘얼굴없는 천사’는 해마다 연말이면 노송동 주민센터 옆 천사공원에 몰래 수천만원씩을 두고 가 화제가 돼왔다. 그러나 올해는 두고 갔다는 성금이 감쪽같이 사라져, 소식을 접한 전주시민들은 씁쓸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북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2015년 12월 28일 오전 11시 30분께 전주시 덕진구 노송동 주민센터 옆 기부천사쉼터 공원에 놓고 간 성금과 응원 쪽지. ⓒ전주시
전북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2015년 12월 28일 오전 11시 30분께 전주시 덕진구 노송동 주민센터 옆 기부천사쉼터 공원에 놓고 간 성금과 응원 쪽지. ⓒ전주시

30일 전주완산경찰서와 노송동주민센터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40분쯤 ‘얼굴없는 천사’가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경찰은 주민센터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에서 성금을 훔쳐간 것으로 보이는 범인을 특정하고 용의자를 추적한 끝에 논산의 A씨의 집에서 이들을 검거했다. 경찰은 이들이 훔친 돈 6000만원을 되찾았다. 범인들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얼굴없는 천사가 거액의 현금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현장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범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없는 천사는 올해도 어김없이 소리없는 선행을 하고자 노송동 주민센터에 몰래 성금을 전달했다. 50대 남성으로 추정되는 얼굴없는 천사는 이날도 여느 때와 같이 “주민센터 뒤 천사공원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성금을 두고 간다”고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해마다 찾아오는 얼굴없는 천사임을 직감한 주민센터 직원 3명은 곧바로 천사공원으로 달려갔다. 주민센터 바로 뒤에 조성된 천사공원은 어른 걸음으로 1분 이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직원들은 천사공원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황한 직원들이 공원 구석구석을 찾아보았으나 얼굴없는 천사가 두고 갔다는 성금은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얼굴없는 천사는 매년 A4용지 상자에 현금을 넣어 전달했기 때문에 눈에 띄기 쉬운 크기였지만 한 시간여를 찾았어도 발견되지 않았다.

성금을 전한 뒤 멀리서 지켜보던 얼굴없는 천사는 주민센터 직원들이 성금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을 알아채고 2∼3차례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정확한 장소를 다시 알려줬으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1시간 넘게 고심하던 전주시는 천사의 성금이 도난당한 것으로 보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전주의 ‘얼굴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천만원이 담긴 종이상자를 놓고 사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남몰래 선행을 하고 있는 그를 전주시민들은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천사가 지난해까지 19년 동안 20차례에 걸쳐 전달한 성금이 무려 6억834만560원에 이른다. 이 천사는 지난해 12월에도 지폐 5만원권 1000장과 저금통에서 나온 동전 20만1950원 등 모두 5020만1950원을 기부했다. 그가 놓고 간 A4 상자에는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가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때 일부 언론에서 얼굴없는 천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장기간 잠복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아직까지 그의 신분은 확인되지 않았다. 무속인, 자영업자, 사업가 등 설설이 분분할 뿐이다. 

주민센터는 그가 보낸 성금으로 그동안 생활이 어려운 4500여 세대에 현금과 연탄, 쌀 등을 전달하고 저소득가정 초·중·고교 자녀 10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해왔다. 전주에서 시작된 천사의 선행은 사랑을 퍼트리는 홀씨가 돼 전국에 익명의 기부자들이 늘어나게 하는 ‘천사효과’를 만들어 냈다. 전주시는 그의 선행을 기려 2009년 노송동 주민센터 앞에 천사비를 세우고 천사공원을 조성했다. 

전주시는 “특히 올해는 이 천사가 나타난 지 20년이 되는 해 인데, 너무나 엉뚱한 일이 생겼다”며 당혹스러워 했다. 전주의 한 시민은 “지속적인 경기 불황 속에서도 이 천사가 쉬지 않고 선행을 계속해온 것을 보며 전주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고 자부심이 컸는데, 이 모든 게 한순간에 흔들리게 됐다”며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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