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강도가 된 독립군들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04 08: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5화 - 은행 강도 독립군들이 써내려간 서툴지만 속 시원한 ‘항쟁의 드라마’

영화에서 은행 강도만큼 빤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소재거리가 없다. 영화계의 영원한 스테디셀러인 셈이다. 지난해 국내 스크린에 오른 영화만 봐도 지극히 신사적인 소액털이범의 실화를 다룬 《미스터 스마일》 등 4건에 달한다. 모두 당대의 할리우드 최고 스타들이 열연한 작품들이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경우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한탕주의가 만연하는 탓일 게다. 그래서인지 20세기 침략과 저항의 혼돈 시대에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은행털이’ 소동이 그치지 않았다. 물론 그 목적은 달랐다.

 

“돈을 갖고 튀어라!” 제국주의 침략에 은행털이로 맞선 약소국 독립군들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20년 1월4일 만주 일대를 발칵 뒤집어 놓은 대사건이 터졌다. 이날 저녁 한인 무장단체인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이 간도 룽징(龍井)에서 일제 조선은행의 무장 호송대를 습격해 일본인 경관 등 2명을 죽이고 돈 궤짝을 빼앗아 달아났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5원과 10원짜리 지폐 다발로 1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지금 가치로 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 돈은 중국 옌지(延吉)와 함경도 회령을 잇는 길회선 철도 부설 자금이었다. 헌병대 추격을 따돌린 단원들은 나흘 밤낮을 달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정도 돈이면 독립군 5000명을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체코군이 매물로 내놓은 무기 3만여 정을 사려던 이들은 밀정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탈취한 돈도 대부분 회수되었다. 단원 중 최봉설(1897~1973)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3명은 서대문형무소의 사형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비폭력 독립운동과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의미를 지닌 거사였다. 

15만 원 탈취 사건 현장에 세워진 기념비. 가운데 사진은 최봉설(앉은 이)과 사형당한 임국정. 오른쪽은 사건 피신처로 쓰인 최봉설의 생가 터. 2018년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집이 헐리고 방치된 상태였다.
15만 원 탈취 사건 현장에 세워진 기념비. 가운데 사진은 최봉설(앉은 이)과 사형당한 임국정. 오른쪽은 사건 피신처로 쓰인 최봉설의 생가 터. 2018년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집이 헐리고 방치된 상태였다.

한일병탄 후 만주 독립단체들이 군자금을 모집한 전략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현지 동포들에게 의연금을 걷거나 국내에 잠입해 친일 부호의 돈을 뜯어내는 방법이었다. 기록을 보면 군자금 임무를 맡은 모연(募捐)대원들은 “영수증 발급을 의무화”하며 모금에 따른 거부감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동포 대부분이 소작농이나 영세 상인인데다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있는 자’들도 가진 돈을 순순히 내놓을 리 없었다. 이렇다 보니 액수 면에서 개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행이나 현금 차량을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도 ‘대한광복회’가 경북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한 적이 있다. 1912년 12월24일 새벽 광복회 지휘장 두 사람이 직접 행동에 나서 일제가 거둔 세금 8700원을 가로챘다. 권영만(1878~1964) 지휘장은 환자로 가장해 일본인인 우편마차 주인집에서 숙박한 뒤 병원 치료를 핑계로 마차에 올라탔다. 또 우재룡(1884~1955)은 다리를 부수고 기다렸다가 마차가 멈춘 사이 돈을 챙겨 달아났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내내 미해결 사건으로 분류된 ‘완전범죄’였다. 대략 4억 원으로 추산되는 이 돈은 만주 독립군 자금으로 쓰였다.

1920년 만주 룽징의 한인 상인들이 대표적인 독립군 단체인 ‘대한의군부’에 약정한 군자금 규모가 1만 1400원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마차 습격’ 한 건으로 챙긴 액수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일제가 수탈한 돈을 되찾은 의거”란 명분도 분명한 터라 이와 유사한 ‘모방범죄’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20년 벽두부터 15만 원 사건이 터진데 이어 그 해 11월 국내 한일은행 습격을 모의한 서간도의 ‘보합단’ 단원들이 처형되는 일도 벌어졌다. 또 1929년 4월에는 최양옥(1893~1983)등 ‘대한독립공명단’ 단원들이 경성에 잠입해 일제의 우편물 차량을 공격하기도 했다. 숨막히는 추격전 끝에 결국 붙잡히긴 했지만 ‘대낮 3인조 강도단’ 사건은 호외가 뿌려질 정도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고, 아울러 “무장항쟁이 식지 않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다 15년 간 일제 감옥에 수감되었던 최양옥이 해방 후에는 인천소년형무소장을 맡아 ‘철창살이’를 이어간 일도 흥미가 더해지는 대목이다.

왼쪽부터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 권영만과 우재룡, 대한독립공명단 최양옥. 이들은 끝까지 일제에 무력으로 저항했고 모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왼쪽부터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 권영만과 우재룡, 대한독립공명단 최양옥. 이들은 끝까지 일제에 무력으로 저항했고 모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현금 차량 습격은 다른 식민지에서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폴란드 독립군의 ‘세금 열차’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와 독일 제국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는 한반도만큼이나 끊임없는 외세 침략에 시달렸다. 1795년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 세 나라가 폴란드 땅을 분할 지배한 이래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 봉기가 수차례 일어났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20세기 들어 폴란드 사회당 지도자인 유제프 피우스트스키(1867~1935)가 무장 조직을 결성하고 독립 전쟁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1908년 9월 그는 2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세금을 운반하던 우편 열차를 공격했다. 탈취한 돈은 20여 만 루블이었고 요즘 시세로 약 50억 원에 달했다. 이 사건은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강탈한 기차 습격 사례로 알려져 있다. 피우수트스키는 “우리에게 믿을 건 무력뿐이다”라며 탈취 자금을 바탕으로 1만여 명의 준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하자 그는 독립을 선언하고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3국 분할로 나라를 잃은 지 123년만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폴란드의 세금 열차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식민본국 러시아에서도 은행털이가 붐을 이루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짜르 타도’ 혁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일인데, 훗날 공포 정치를 펼친 이오시프 스탈린(1879~1953)이 행동 대장으로 나섰다. 처음엔 농촌과 중소 도시에서 시작된 그의 강도 행각은 점차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 은행으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여러 번 체포되었지만 그때마다 호송 차량에서 뛰어내리거나 경찰을 때려눕히고 도주했다고 한다. 한때 당에서 은행 강도짓을 금지시키자 스탈린은 현금 수송차량으로 눈을 돌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극을 빚기도 했다.

폴란드 독립군과 건국의 아버지 피우수트스키. 오른쪽은 젊은 시절의 스탈린과 그가 1907년 현금 수송 마차를 습격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폴란드 독립군과 건국의 아버지 피우수트스키. 오른쪽은 젊은 시절의 스탈린과 그가 1907년 현금 수송 마차를 습격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역사가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우연한 사건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또 다른 우연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폴란드 독립을 이뤄낸 피우수트스키는 1919년 소련으로 바뀐 러시아 땅으로 진격했다. 이때 레닌의 오른팔 스탈린도 붉은 군대를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은행 강도 전력을 지닌 이들이 전쟁터에서 맞붙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은 폴란드가 영토 일부를 되찾는 것으로 끝났고, 그 뒤로 두 사람은 똑같이 철권통치를 휘둘러 ‘은행 강도 출신의 독재자’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동서양서 벌어진 은행 강도 사건은 처절한 ‘피의 드라마’

인류 역사가 그렇듯 현재의 평화 속에는 늘 피비린내 나는 일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20세기 제국주의 시대 동서양에서 벌어진 은행 강도 사건은 힘없는 자들이 써내려간 처절한 ‘피의 드라마’였다. 준군사 조직이나 혁명 정당의 이름으로 행해진 외국과 달리 우리의 그것은 딱히 조직이랄 것도 없이 오직 애국심 하나로 뭉쳐 결행된 일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파장은 작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에 짓눌린 민중들의 울분을 속 시원히 풀어준 ‘사이다 의거’였고, 민족의 항전 의지를 일깨웠으며 또한 침체된 무장항쟁의 불씨를 되살리는 역사적 의미도 함께 지녔던 것이다.

지금 2020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오늘의 번영과 평화가 이런 이름 없는 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일궈진 사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역사는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힘이다. 이제 잊혀져가는 역사의 갈피를 들추어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