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왜 협치는 서로 말뿐일까?
  •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15 18:00
  • 호수 1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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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우리 국회는 패스트트랙과 필리버스터라는 낮선 용어만큼이나 초유의 대치정국으로 끝났다. 사실상 20대 국회를 그런 식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20대 국회가 4개월 이상 남았지만, 이미 차기 총선 정국이 시작됐다. 상생의 정치니 협치니 내걸지만, 우리 정치는 늘상 그랬다. 왜 그럴까?

상생의 정치와 협치 자체가 이루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늘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목표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칼 슈미트(Carl Schmitt) 같은 사람은 아예 정치를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완전한 상생의 정치는 아니더라도, 많은 나라들에서 협의의 정치, 합의의 정치는 적지 않게 이뤄지고 있다.

텅 빈 국회 본희의장에서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이 12월24일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텅 빈 국회 본희의장에서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이 12월24일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문재인 대통령도 협치를 촛불 이후 한국 정치의 당연한 목표로 약속했다. 그러나 구호에 그쳤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초기를 지나면서는 오히려 양극화의 대결정치가 두드러졌다. 사실 협치의 분명한 전략 같은 것도 없었다. 승자독식의 대통령제에서 협치는 대통령이 야당과 비판 세력을 포용할 때 가능하다. 제1야당이 적폐 세력으로 청산 대상이 돼 버린 상태에서 포용의 정치는 내세우기가 어려웠다. 민주당 정권보다 더 좁은 의미의 친문 정권이라고까지 야당은 성토했다. 간혹 여야 국정협의체를 가동하자고 했지만, 대연정 체제가 아닌 상황에서 애초에 작동하기 어려운 협의체였다.

여야 대치정국이 쟁점이 될 때마다 언론들에서 협치와 상생의 정치를 주문했다. 이런 질책과 주문에도 우리 정치는 별 개선 효과가 없었다. 지난 2012년 5월 제도적으로 협의의 정치를 이끌어보자고 국회법을 개정했다. 우리 국회를 선진화시키기 위해 개정한 국회법이라고 해서 흔히 ‘국회 선진화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역시 협의의 정치를 촉진하지 못했다. 싸우지 못하고 협의도 잘 못하니 무기력한 식물국회라고들 비난했다. 물리적으로 충돌하곤 했던 선진화법 이전의 동물국회보다 나아진 게 없다고 했다. 그 한계 속에서 여당의 일방주의와 제1야당의 막무가내가 충돌했던 것이 20대 국회 말의 모습이었다.

왜 선진화법의 취지대로 협의의 정치를 이끌지 못했을까? 아직 우리의 정치 풍토가 협의의 정치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제도 개혁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고 효율성만 떨어지니, 다시 원상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우리의 정치 중심은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과 이를 둘러싼 권력투쟁에 있다. 바로 이 정치의 중심이 협의 모델이 아니고 승자독식 체제이다. 더구나 우리의 여당은 완전히 대통령 권력에 종속돼 있다. 승자독식의 대통령 스스로가 협의제를 실현하지 않는 한, 국회만의 협치 기대는 연목구어다.

그래서 우리 정치에서 협치 모델을 기대한다면 개혁의 핵심은 대통령 리더십과 대통령제에 있다. 국정운영 방식과 주도 세력 구성에서 협치를 선도해야 한다. 그나마 근접했던 게 DJP 연합정부였다. 근원적으로 승자독식의 현행 대통령제를 개편해야 한다. 개헌을 동반해야 하는 대통령제의 개편은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되었다. 차선의 전략으로 국회의원 선거제도의 개편이 이뤄졌다. 국제적으로도 초유의 제도 실험으로, 민주적 대의제도로서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다. 보완 과제를 안은 채 출발하고 있다. 어렵지만 양극화의 정치를 허무는 단초를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상생의 정치와 협치가 시시포스의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승자독식의 대통령제에 대한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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