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수용자가 트렌드 이끄는 시대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1.24 10:00
  • 호수 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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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언론이 내세우는 스타 ‘일방 수용’하던 시대 막 내려

과거엔 방송사 콘텐츠가 트렌드를 이끌었다. 《논스톱》의 조인성, 《학교》의 공유,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 등 모두 방송사 제작진이 선택해 스타로 만든 사례들이다. 아이유가 데뷔 초에 토끼 인형옷을 입고 ‘토끼유’ 신드롬을 일으킨 것도 TV 프로그램의 설정을 통해서였다. 최신 영화가 트렌드를 만들기도 했다. 영화 《친구》를 통해 유오성이 뜨는 식이다. 하지만 요즘은 최신 프로그램이나 영화와 상관없는 트렌드가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다)하는 현상이 잦아진다.

2018년 말에 중견배우 김영철이 갑자기 떴다. TV나 영화 등에서 아무런 계기가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핫’한 인물이 됐다. 알고 보니 2002년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누리꾼들이 발견해 화제로 만든 것이었다. 바로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으로 나온 김영철이 미군과 임금 협상을 벌이는 장면이다. 여기서 김영철은 임금을 깎으려는 미군에 맞서 고집스럽게 ‘4딸라’를 외친다. 우리나라가 현실에선 미국에 끌려가는 처지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4딸라’를 고수하는 김영철의 모습에서 누리꾼이 대리만족을 느꼈다.

무려 16년이나 지난 드라마 영상을 발견한 누리꾼들은 이것을 ‘짤방’이란 형태로 재가공해 인터넷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기존 매스미디어의 역할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누리꾼 한 명 한 명이 알아서 각자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 짤방이 퍼지고 퍼져 결국 김영철은 창졸간에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젊은 층을 대상으로 ‘4딸라’ 대사를 활용한 광고를 찍고 ‘2019 올해의 브랜드 대상’ CF모델 부문 대상까지 수상했다. 이 인기에 주목한 자유한국당이 한때 김영철을 영입 리스트에 올려 빈축을 사기도 했다.

(왼쪽)JTBC 《슈가맨3》에 출연한 가수 양준일 (오른쪽)누리꾼들이 만들어낸 ‘직통령’(직장인들의 대통령) 펭수 ⓒ JTBC·EBS
(왼쪽)JTBC 《슈가맨3》에 출연한 가수 양준일 (오른쪽)누리꾼들이 만들어낸 ‘직통령’(직장인들의 대통령) 펭수 ⓒ JTBC·EBS

‘강제 전성기’를 당하는 사람들

이렇게 네티즌에 의해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전성기가 오는 것을 강제 전성기라고 한다. 2019년 여름엔 김응수가 강제 전성기를 당했다. 2006년 개봉작 《타짜》에서 김응수가 연기한 조폭 곽철용을 누리꾼들이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김응수의 영화 속 모습이 짤방으로 퍼져 나가고 “묻고 더블로 가”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화란아, 나도 순정이 있다” 등 곽철용의 대사들이 유행어에 등극했다.

최신 출연작은 오히려 화제가 되지 않았는데, 2006년작을 누리꾼이 발견해 준 덕분에 김응수는 잇따라 예능 프로그램과 CF에 출연했다. 모델료가 두 배 이상 뛰어오르고 배우 생활 30년 만에 화장품 광고에 진출한 것도 이런 신드롬 덕분이다. 요즘 《코미디 빅리그》에선 곽철용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패러디 코너를 내보내고 있다.

모든 것을 희화화하며 유희의 소재를 찾는 것이 인터넷 문화다. 마치 채굴하듯이 맞춤한 유희 소재를 캐내면 광속의 속도로 퍼뜨리며 거대한 유희 생태계를 형성한다. 짤방과 패러디가 주요 수단이다. 이런 누리꾼 재가공 콘텐츠가 인터넷을 뒤덮으면 기성 매체와 광고계가 호응하며 강제 전성기가 시작된다.

2019년 가을엔 누리꾼들에 의해 펭수가 강제 전성기를 맞이했다. EBS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펭수를 만들었고 편성도 어린이 예능에 배치했다. 하지만 2030 누리꾼들이 EBS의 의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펭수를 ‘직통령’(직장인들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방송사는 펭수의 방송시간대와 언행을 누리꾼 요구에 맞춰 성인용으로 바꿨다.

2019년 겨울엔 양준일 신드롬이 나타났다. 이건 누리꾼과 방송사의 합작품이다. 1991년에 데뷔한 양준일의 영상을 처음 발견한 건 누리꾼들이었다. 인터넷에서 양준일의 영상을 공유하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JTBC가 미국 식당에서 서빙하며 살고 있던 양준일을 삼고초려해 《슈가맨》에 출연시켰다. 이 프로그램으로 현재의 양준일을 실제 본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호응했다. 그 결과 양준일 팬클럽이 만들어지고 양준일은 마침내 연예계에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누리꾼이 발견하고 방송사가 본격적으로 확대시킨 사례다.

 

적폐도 해결하는 누리꾼

누리꾼들은 방송 적폐를 해결하기도 한다. 조작으로 PD와 CP가 구속된 초유의 사태도 누리꾼들이 만들었다. 바로 《프로듀스101》 투표 조작 사건이다. 이 시리즈 초창기부터 누리꾼들이 지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했지만 기존 매체들은 무시해 왔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프로듀스101》 4탄에선 수치를 하나하나 분석해 각 등수 사이에 2만9978표 차이가 반복된다는 걸 밝혀냈다. 모든 순위의 득표수 차이가 7494.442라는 특정 숫자의 배수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도 분석해 냈다. 이 정도까지 밝혀내니 기성 매체와 수사기관이 이 이슈를 안 받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제작진이 구속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인터넷이 시작된 이후 누리꾼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 왔다. 과거엔 매스미디어가 다수의 개인들에게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보내기만 할 뿐 개인들이 다수에게 메시지를 보낼 방법이 없었다. 인터넷은 개인에게 세계로 연결된 소통의 창을 열어줬다. 과거엔 매스미디어를 통해야만 다른 개인들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전달받을 수 있었는데 이젠 개인이 개인들과 직접 연결되는 세상이다.

개인들의 연결을 수월하게 해 주는 서비스, 즉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봇물을 이뤘고 SNS가 발달할수록 개인들의 힘이 강해졌다. 개인이 전 세계를 상대로 생방송까지 할 수 있는 유튜브가 발달하면서 개인들의 파괴력이 더 커졌다. 과거 국제 생방송은 대형 방송사 아니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렇게 개인들의 힘이 커졌는데, 그 개인은 고립된 개인이 아닌 연결된 개인이다.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된 ‘넷’ 세상의 구성원들. 우리 식 영어 조어로 그들을 인터넷 시민(citizen)이라는 의미의 ‘네티즌’이라고 불렀다. 그 네티즌이 트렌드를 만들고 방송가 적폐를 척결하는 등 현실 세상을 뒤흔드는 가히 ‘네파시대’(네티즌 파워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 시점은 나중에, 인터넷 세상의 힘이 기성 시스템의 권능을 뛰어넘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자본과 언론이 내세우는 스타와 트렌드를 개인이 수용하기만 하던 모습은 과거 유물이 되었다. 이젠 연결된 개인들이 점지한 스타와 트렌드를 자본과 언론이 수용하는 역주행이 일어난다. 기성 매체들도 유튜브에 뛰어들어 개인들과 동등한 한 ‘채널’로 소통한다. 매스미디어 독과점이 깨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인터넷 집단 포퓰리즘에 공론장이 휘둘릴 위험도 커졌다는 점에선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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