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환경을 파괴하는 암퇘지”
  • 이수민 독일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6 11:00
  • 호수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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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어린이 합창단 영상이 불러온 파장…독일 사회 분열 민낯 보여준 ‘할머니 게이트’

지난해 12월27일, 크리스마스의 온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분위기에서 독일 공영방송인 ‘서부독일방송(WDR)’은 페이스북에 어린이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은 곧이어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소위 ‘할머니 게이트’라 불리며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 어린이들이 부른 노래의 가사 때문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닭장에서 오토바이를 탄다. 매달 1000리터의 기름을 먹는 오토바이를. 우리 할머니는 환경을 파괴하는 암퇘지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기존의 동요를 개사해 친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베이비붐 세대를 꼬집어 지적했다. 

아이들이 독일 공영방송인 ‘서부독일방송’에서 “할머니는 환경을 파괴하는 암퇘지”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방영해 논란이 되고 있다. ⓒ 유튜브 캡쳐
아이들이 독일 공영방송인 ‘서부독일방송’에서 “할머니는 환경을 파괴하는 암퇘지”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방영해 논란이 되고 있다. ⓒ 유튜브 캡쳐

고령층의 분노 고소까지 이어져

가사에 등장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할머니는 SUV를 탄 채 할아버지들을 치고 다니고, 공장식 사육을 당한 고기를 사서 매일같이 커틀릿을 먹으며, 비행기를 타지 않고 크루즈 여행을 한다고 묘사된다.

SUV는 기름을 많이 먹고, 환경을 오염시킨다. 할아버지를 치고 다니는 무개념성, 동물의 존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사육 방식으로 생산된 저가의 고기를 소비하는 행위, 그리고 비행기보다도 훨씬 환경을 오염시키는 크루즈 여행까지 이 모든 것들은 지속 가능한, 친환경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러한 할머니의 모습은 ’환경을 파괴하는 암퇘지’라는, 욕설과 다름없는 모욕적인 표현과 동반된다. 그것도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목소리로 말이다.

즉각 이러한 표현에 대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었다. 서부독일방송은 비판이 제기된 직후 영상을 삭제하고 ‘풍자’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해당 영상은 이미 유튜브와 트위터 등을 통해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영상이 게시된 지 3일 후인 12월30일 기준으로 트위터에는 이와 관련된 해시태그가 21만 개 정도 올라왔다. 독일 노트르라인-베스트팔렌주 총리인 아르민 라스케(Armin Laschet)가 트위터에서 공개적으로 이 영상에 대한 불편함을 표출했고, 서부독일방송 관계자들은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결국 서부독일방송의 감독자인 톰 부로프(Tom Buhrow)의 공식 사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된 듯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이 문제는 독일 언론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되며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할머니 게이트’는 인터넷에서만 이루어진 논쟁이 아니라 실질적인 행위로까지 이어졌다. 영상이 공개되고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독일 쾰른에 위치한 공영방송 사옥 앞에서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시위대의 규모는 약 200명으로 추정됐다. 대부분 극우세력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극우파와 무관한 시민도 많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주요 언론에 속하는 슈피겔과 차이트 등은 이 영상에 적극적으로 비판을 제기한 사람들 대부분이 극우파에 속하는 이들이라고 규정 지어진 채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1월28일 쾰른지검 검사장의 발표에 따르면 서부독일방송은 200명에게 고발을  당한 상태이며 이 중 극우세력과 무관한 시민들도 다수 있다. 특히 노래에서 지적되고 있는 고령층과 할머니·할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분노해 고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 일부 언론에서는 “월 2만2000원에 달하는 전파수신료를 받는 공영방송이 자신이 대변하고 신뢰해야 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풍자’를 했으며, 이에 대해 대중들의 반응이 싸늘한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즉 이 영상에 대해 항의하고 방송사 앞에서 시위하는 이들을 극우세력으로 싸잡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개인적 의견을 넘어 공정해야 하고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영방송이 제 의무를 망각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편적 환경 문제에도 분열하는 독일 사회

차이트 편집장인 요제프 요페(Josef Joffe)의 칼럼에 따르면 ‘풍자’는 예리한 칼날처럼 작용해야 한다. 풍자의 대상이 공격받는다는 기분보다는 같이 웃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서부독일방송은 이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고 지적받는다.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깊어졌다면 훨씬 생산적이었겠지만, 요페가 지적하듯 ‘할머니 게이트’의 논점은 해당 영상 자체에서 벗어나 사회를 분열시키기에 이르렀다. 일단 극우세력에서 이 영상을 보고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공영방송이 극좌파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며 분노했고, 이에 부로프의 공식 사과가 이어졌다. 그러자 좌파세력은 ‘어떻게 극우파의 항의에 곧장 사과할 수 있느냐’며 공격을 가했으며, 일부 직원들은 부로프의 해고를 강하게 주장했다. 즉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 어린이 합창단의 영상이 독일 사회의 정치적 분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리트머스시험지가 돼 버린 것이다.

환경 문제에 대한 세대 간의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 고령층을 싸잡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점에 대한 불편함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비난받을 만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40년 전부터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친환경 활동을 한 시니어들의 존재를 망각했다는 것이다. 환경과 같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하는 보편적인 문제에 나이·거주지·출신 등에 따라 대립하고 분열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벌어진 독일의 ‘할머니 게이트’는 새해를 맞이한 독일 사회에 큰 과제를 안겼다. 미래에 독일 사회는 어떠한 ‘올바른’ 토론 문화를 실천할 것이며, 사회적 분열이 아닌 사회적 화합을 통한 문제 해결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한동안 독일 사회의 고민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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