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우먼부터 할리 퀸까지…여성 히어로는 어떻게 자립했나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1 14:00
  • 호수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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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슈퍼히어로 솔로 무비 시대…스크린에 당당히 서기까지의 역사

혹평 세례 속에서도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가 남긴 게 하나 있다. 바로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 퀸이다. 자멸하는 이야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혈혈단신 존재감을 과시하며, 전 세계에 코스프레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던 마성의 캐릭터. DC가 이 뜨거운 반응을 놓칠 리 없다. 할리 퀸을 중심으로 한 여성 팀업 무비 《버즈 오브 프레이(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가 그 결과물이다. 조합이 다소 흥미롭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DC 코믹스에 등장하는 여성 히어로 팀. 코믹스에서 할리 퀸은 이 팀 소속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뭉친다? 워너 브러더스는 코믹스 설정을 과감하게 비틀어 이들의 인연을 새롭게 조립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이 영화 관람의 첫 번째 포인트. 두 번째 포인트는 할리 퀸의 매력이 어떻게 구현됐는가에 찍힌다. 비밀은 2월5일 확인할 수 있다.   

할리 퀸뿐 아니라, 올해는 여러 여성 ‘히어로/안티 히어로’들이 스크린에 당도한다. 마블 팬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솔로 무비 제작 요구가 있었던 어벤져스 원년 멤버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의 솔로 무비가 4월 찾아오고, 6월에는 《원더우먼》(2017)의 속편 《원더우먼 1984》가 개봉한다. 여성 히어로 무비가 힘을 쓰지 못했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분명 달라진 풍경이다. 과거, 여성 히어로는 히어로물 영화에서 셋방살이 신세로 지내거나, 주인공의 미션 성공을 위한 조력자 혹은 멜로 상대에 머물렀다. 그랬던 슈퍼히어로 업계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남성 편향적이었던 히어로 시장에서 여성들이 자립적으로 독립하기까지, 그 역사를 살펴봤다.

때는 바야흐로 1984년. 실사판 여성 히어로 영화의 시조라 할 만한 캐릭터가 나타났다. 이름하여 ‘슈퍼걸’. ‘슈퍼’라는 명칭에서 족보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슈퍼맨’의 사촌 여동생이다. 크리스토퍼 리브가 출연한 《슈퍼맨》의 흥행 돌풍을 타고 등장한 《슈퍼걸》은 그러나 ‘망작’이란 평가와 함께 폭풍처럼 사라졌다. 퇴장은 빨랐으나 오명은 끈질기다. ‘최악의 히어로 영화’를 꼽는 설문에는 아직도 《슈퍼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말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슈퍼걸 역을 따낸 헬렌 슬레이터 역시 영화의 흥행 참패와 함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맺은 인연은 소중한 법. 2015년 TV 시리즈로 부활한 《슈퍼걸》에 카메오로 출연하며 ‘원조 슈퍼걸’의 추억을 소환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DC 《캣우먼》-마블 《엘렉트라》의 뼈아픈 실패

할리 퀸처럼 인기를 얻어 솔로 무비로 분가한 여성 히어로들은 꽤 있다. DC 《배트맨》 시리즈에서 매력적인 조연으로 등장했던 안티 히어로 캣우먼이 대표적이다. 2004년 스크린에 상륙한 《캣우먼》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은 할리 베리가 타이틀 롤을 맡으며 제작 단계에서부터 큰 화제 몰이를 했다. 그러나 아뿔싸. 영화는 할리 베리의 섹시한 외모에만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정작 중요한 캐릭터의 매력과 이야기의 재미를 놓치고 말았다. 이 영화가 알려준 교훈. 아무리 연기 잘하는 배우라도 허술한 시나리오 앞에서는 작아진다는 사실이었다. 할리 베리는 그해 최악의 영화를 꼽는 골든라즈베리 어워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오스카 트로피를 안은 지 불과 3년 만의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할리 베리의 기개와 도전정신은 빛났다. 캣우먼의 아픔을 딛고 《엑스맨》 시리즈 스톰 역으로 출연, ‘히어로가 다른 히어로로 잊히는’ 놀라운 광경을 펼쳐 보였다.

애초에 《캣우먼》 솔로 무비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할리 베리가 아니다. 그것은 팀 버튼이 연기한 《베트맨2》(1992)에서 캣우먼을 연기한 미셀 파이퍼다. 조연에 불가했던 캣우먼은 미셸 파이퍼의 매력과 결합해 주연이었던 배트맨(마이클 키튼)을 능가하는 존재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캣우먼이 할리 베리에게 ‘오점’을 남겼다면, 미셀 파이퍼는 캣우먼을 통해 연기 인생의 ‘방점’을 찍었달까.

《캣우먼》 개봉 이듬해인 2005년엔 마블에서 여성 솔로 무비가 나왔다. 제니퍼 가너가 연기한 《엘렉트라》다. 간혹 마블의 첫 번째 여성 솔로 히어로가 ‘캡틴 마블’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캡틴 마블은 ‘마블 스튜디오’가 운용하는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의 첫 번째 여성 히어로다. 마블 코믹스 전체로 확장해서 보면 캡틴 마블보다 엘렉트라가 영화 쪽에서는 선배다. 엘렉트라는 2003년 개봉한 벤 애플렉 주연의 마블 슈퍼 히어로 영화 《데어데블》에 출연했던 캐릭터다. 그래픽 노블의 거장 프랭크 밀러가 창안한 안티 히어로로 《데어데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솔로 무비 주인공 자리까지 꿰찼다. 그러나 《엘렉트라》 역시 영화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연출은 엉성했고, 캐릭터 매력은 충분히 살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캣우먼》과 《엘렉트라》의 실패는 향후 여성 슈퍼히어로 영화 제작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미쳤다. “여성 히어로물은 흥행이 안 된다”는 인식이 할리우드 제작자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퍼져 나간 것이다. 두 영화의 흥행 실패는 엄밀히 말해 만듦새의 결함 때문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화살을 ‘여성 캐릭터’에 돌렸다. 그렇게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의 암흑기는 10년 이상 지속됐다.

(왼쪽부터) 영화 《캣우먼》, 영화 《원더우먼》, 영화 《캡틴 마블》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왼쪽부터) 영화 《캣우먼》, 영화 《원더우먼》, 영화 《캡틴 마블》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원더우먼》의 뒤집기, 《캡틴 마블》의 굳히기

여성 히어로물에 대한 편견을 깬 이는 원더우먼이다. 1941년 DC코믹스에 등판한 원더우먼은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은 대표 히어로다. 원더우먼의 존재감을 알리는 데는 TV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70년대 린더 카터 주연의 《원더우먼》이 TV 시리즈로 방영되며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호리호리한 몸에서 괴력을 뿜어내는 원더우먼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겼다. 페미니즘에 입각해 탄생한 원더우먼은 그러나, 과다노출 패션과 사슬에 감기는 모습 등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 모순된 캐릭터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무려 캐릭터 탄생 76년 만인 2017년, 원더우먼의 첫 실사판 솔로 무비가 등장했다. 《몬스터》(2003)에서 여성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풀어낸 경력이 있는 패티 젠킨스 감독은 다소 구시대적이고 섹시 어필 캐릭터로 인식되던 원더우먼에게 21세기적 매력을 이식시켰고 그것이 통했다. 갯 가돗이라는 히로인을 탄생시키기도 한 《원더우먼》은 여성 히어로 솔로 무비의 암흑기를 종결시키는 것은 물론, 헛발질 연속이던 DC를 암흑의 늪에서 건져 올렸다.

그리고 마블의 《캡틴 마블》(2019)이 등장했다. 지구 절반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강적 타노스에 당당하게 맞선 파란의 주인공. 브리 라슨이 연기한 ‘캡틴 마블’은 젠더-페미니즘 논란과 그로 인한 평점 테러 속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거두며 여성 솔로 무비 《원더우먼》의 성공이 우연이나 단발성이 아님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한계와 편견을 딛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성장의 과정은 그 자체로 적잖은 감동을 안겼다.

《캡틴 마블》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통제해 왔던 스승 로슨(주드 로)이 “네 능력을 증명해 보라”고 명하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당신에게 나를 증명해야 하지?” 더 이상 타인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의 삶을 살 필요도, 또 그에 맞춰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음을 인식하고 내뱉은 말이다. 여성 히어로 무비도 지금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을까. 여러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성공을 지렛대 삼아, 여성 히어로들은 지금 자신들의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펼쳐 보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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