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55세” 5대 그룹 총수 ‘생존 경쟁’ 달아올랐다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4 10:00
  • 호수 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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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퇴장으로 1세대 종언…이재용·정의선·최태원·구광모·신동빈 성적표 주목

창업 1세대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월19일 별세하면서 국내 5대 그룹 총수들 간 경쟁구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모두 재벌가(家) 자제들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신 명예회장의 후계자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66)은 아버지 후광에 가려 있다가 이제 5대 그룹 총수 중 ‘맏형’으로서 집중 조명을 받게 됐다. 신 회장을 비롯해 이재용(53·삼성), 정의선(51·현대차), 최태원(61·SK), 구광모(43·LG) 등 오너 2~4세 총수들은 험난한 경제 여건 속에서 선대(先代)에 필적하는, 또 경쟁자들을 넘어서는 경영 능력을 보여줘야 하는 부담을 짊어졌다. 너도나도 그룹명 앞에 ‘뉴(new)’를 붙이며 내부에 쇄신 바람을 불어넣는 가운데 실시간 성적표가 그들 앞으로 날아들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향후 롯데는 호텔롯데 상장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과 실적 부진 타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신 명예회장 사후 ‘신동빈 원톱 체제’를 더욱 굳히기 위해서다. 이는 신 회장 원톱 체제가 아직은 확고부동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 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뉴스1·시사저널 박정훈
ⓒ 연합뉴스·사진공동취재단·뉴스1·시사저널 박정훈

‘신동빈號 롯데’ 성과 여전히 물음표 

신동빈 회장은 친형이자 롯데가 장남인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다가 지난해 2월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6월 열린 롯데홀딩스 정기 주주총회에서도 신 회장은 이사에 재선임되면서 한·일 롯데 통합 수장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영권 수성의 불안 요소를 타개하기 위한 지배구조 개선이 그룹 최대 이슈인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아울러 신 회장의 경영 능력에는 ‘확실한 신동빈표 업적이 없다’는 물음표가 달려 있다. 

롯데 경영권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일본 롯데홀딩스도 ‘혼네(本音·속마음)’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모습이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지난해 2월 신 회장을 1년 만에 대표이사 자리에 앉히면서 “급변하는 사업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롯데를 성장시켜 온 신 회장의 경영 수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고 밝혔다. 시사저널 취재 결과 실제 내부 분위기는 ‘다테마에(建前·겉마음)’와 달랐다. 일본 롯데홀딩스 관계자는 “아직 (일본 롯데홀딩스 내에서) 대놓고 얘기하는 쪽은 없어도 전반적으로 신 회장에 대해 ‘관심이 없는’ 수준이다. 잘한 게 딱히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라며 “현재 세상이 아는 롯데의 대표 성과들은 대부분 창업주(신격호 명예회장)가 이뤄낸 것들”이라고 말했다. 일본 언론에도 신 회장의 경영 성과보다는 구속수감, 면세점 사업 부진 등 부정적인 보도가 주를 이뤘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호텔롯데 상장의 발목을 잡는 유통 부문 실적 부진에 그룹 신(新)성장동력인 롯데케미칼마저 글로벌 업황 악화 속에 휘청거리는 상황. 신 회장이 1월2일 신년사와 1월16일 사장단회의를 통해 잇달아 생존을 위한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2018년 6월 취임한 LG가 4세 구광모 회장도 신 회장과 마찬가지로 ‘1인자’로서의 입지를 더욱 탄탄하게 다져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취임 3년 차를 맞은 지금까지는 경영 성과가 아닌 이미지, 소통 방식 등에 관심이 집중돼 왔다. 

구 회장은 1월2일 임직원들이 강당 등 별도의 장소에 모이는 오프라인 시무식을 없애고 신년사를 디지털 영상으로 대체했다. 달라진 신년 행사는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 직원 등 전 세계 구성원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겠다는 구 회장의 의지를 반영한 결과다. LG 측은 이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하고 실용주의적인 경영 방식”이라고 홍보했다. 

LG, 40대 구광모 통한 실질적 변화 갈망 

그러나 LG 내부에선 말뿐인 ‘소탈’이나 ‘실용주의’가 아닌 진짜 변화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LG전자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조직 문화, 소통 부족, 마케팅 실패 등 회사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임원회의 등에서 집중적으로 논의하며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젊은 오너(구광모 회장)가 경영 일선에 나섰는데도 특유의 보수적인 LG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내부 불만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동안 LG는 내·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사세에 걸맞지 않게 변화와 혁신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2011년 4월엔 한 LG전자 선임연구원이 회사에 대해 ‘혁신을 하는 게 아니라 하겠다고 주장만 한다’ ‘자유로운 토론이 없다’ ‘직원을 주인으로 대해 주지 않으면서 주인의식을 가지길 원한다’는 등 뼈아픈 지적을 구본준 당시 부회장에게 직접 전달한 뒤 퇴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경쟁사나 시대에 뒤처진 LG전자 마케팅도 꾸준히 문제로 지적됐다.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에는 LG전자의 마케팅 실패와 관련한 페이지가 따로 정리돼 있을 정도다. 구직자들이 많이 찾는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기업분석 보고서마저 LG전자의 아쉬운 마케팅 역량을 약점으로 소개해 놨다. 

구 회장은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영 스타일을 발휘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9월 처음 주재한 사장단회의에서 “앞으로 몇 년이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올해 신년사에선 “앉아서 검토만 하기보다 방향이 보이면 일단 도전하고 시도해야 한다”며 위기 극복과 체질 개선을 당부했다. 취임 후 적응, ‘뉴 LG’ 비전 선포 등 사전 정지 작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이제 실질적인 성과를 내놓을 차례다. 

신동빈 회장과 같은 2세대 경영인인 최태원 SK 회장은 5대 그룹 총수 중 신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나이가 많지만, 경영 전면에 나선 지는 가장 오래됐다. 1998년 회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 왔다. 올해도 전기차, 인공지능(AI) 등을 중심으로 한 SK의 사업 재편을 진두지휘하는 동시에 재계의 대표 스피커, 사회적 가치 전도사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법한 최 회장의 외부활동은 ‘본업’인 SK 경영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란 평가가 많다. 시사저널이 최근 2009~18년 사이 대기업집단 59곳의 자산총액과 매출, 계열사 수 등을 전수조사한 결과, SK의 10년 동안 자산 성장률이 149.5%로 10대 그룹 중 가장 높았다. 2012년 SK텔레콤이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를 인수하면서 자산이 급증한 영향이 컸다. 

한국CXO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자산 규모 기준 ‘빅4’ 순위는 삼성(414조원), 현대차(220조원), SK(217조원), LG(129조원) 순이다. 하지만 매출 규모론 SK가 이미 2위 자리에 올라 있다. 더군다나 영업이익률은 4대 그룹 중 SK가 2015년부터 4년 연속 삼성을 제치고 1위를 지켰다. 오일선 CXO연구소 소장은 “현대차의 주력인 자동차보다 SK의 주력인 반도체 산업이 상대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지향하다 보니 두 그룹에 변화를 가져왔다”면서 “현재 같은 속도라면 빠르면 1~2년 안에 SK가 자산, 매출, 영업이익에서 재계 2위로 올라설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현대차-SK, 2위 각축전 치열  

2017년부터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현대차 경영 전면에 나선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재계 2위의 지위를 지키고, 급변하는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떠안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1월7일 미국 라이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0’에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우버와 함께 개발한 개인용 비행체(PAV) 콘셉트 모델 ‘S-A1’이었다.

그런데 이날 공교롭게도 국내 증시에서 현대차 주가는 3%나 급락했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정 수석부회장을 위시한 현대차에 냉정하고 솔직한 평가가 내려진 거라 분석했다. 정 수석부회장의 자신감 넘치는 CES 발표와 달리 수소·전기차, 자율주행차 등 미래 시장에서 현대차가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 투자자들은 낙관하지 못하는 중이다. 

자산 400조원 시대를 열며 압도적인 재계 1위를 달리는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병철 창업주에 이어 강력한 리더십으로 그룹을 이끌던 2세 이건희 회장(79)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부터다. 이 부회장은 2018년 2월 국정농단 사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이후 같은 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동일인 지정으로 공식적으로 삼성 총수에 올랐다. 

반도체, 스마트폰, 5세대(5G) 통신, AI 등 주력·미래 사업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삼성은 ‘오너 리스크’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 부회장은 1월21일 사장단과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뉴 삼성’으로의 변화에 속도를 낸다는 의지를 천명했으나, 이 부회장의 최종 판결을 앞둔 불확실성 속에 대대적인 변화는 꾀할 수 없었다. 

대신 이 부회장은 ‘현장 경영’ ‘미래 경영’ 등 키워드를 통해 총수로서의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설 연휴 중이던 1월27일 브라질 북부 아마조나스주에 있는 삼성전자 마나우스 공장을 찾은 자리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은 끊임없는 도전과 혁신에서 나온다”며 “과감하게 도전하는 개척자 정신으로 100년 삼성의 역사를 함께 써 나가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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