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가 안전해야 나도 안전하다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8 16:00
  • 호수 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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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원한다면 혐오를 거두자

남성, 여성을 막론하고 페미니즘 이론계 바깥의 사람들은 젠더라는 말을 무척 어려워한다. 하지만 이들이 아주 쉽게 이해하는 용어가 있다. 바로 트랜스젠더다. 성전환수술을 받아 태어났을 때의 성별로부터 다른 성별로 몸을 바꾼 것이라고 이해한다. 법적으로는 주민등록번호의 1을 2로 또는 2를 1로 전환하는 간단해 보이는 작업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트랜스젠더들은 이미 사춘기 무렵부터 자신의 신체와 성별 정체성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의식하며 힘들어하고, 특히 남중(男中), 남고(男高) 같은 환경에서는 괴롭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별 변경은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생식기관의 완전한 제거나 변경을 위한 수술도 받아야 한다.

숙명여자대학교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입학하자 입학 찬반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숙명여자대학교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입학하자 입학 찬반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성별 이분법에 갇힌 ‘생물학적 여성 중심주의’

최근 법원은 성전환수술을 받은 자에 한해 성별 정정을 허가하던 데서 트랜스젠더 남성(여성이 남성으로 전환하고 싶은 경우)들에게 성기성형수술을 받지 않았어도 성별 변경을 허락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외부 생식기의 완전한 변경까지 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부담이 크고 행복추구권 등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성별 범주가 고정 불변이 아니라 흔들리는 것이며, 이를 이해할 때 인간 존재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짐을 알려준다. 법원의 태도 변화 또한 미흡하나마 그러한 성숙의 산물이다.

장황하게 이야기했다. 얼마 전에 육군부사관 변희수 하사가 성별을 바꾼 것에 이어, 숙명여대에 트랜스젠더 여성이 합격했다는 소식이 던진 파문 때문이다. 편의상 A씨라고 하자.

A씨의 합격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여자대학의 일부 학생들이 반대 성명을 냈다. 이들은 트랜스젠더 여성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고 그 어려운 성별 전환의 과정을 거친 A씨를 여전히 남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A씨의 입학이 남성 권력이 침탈해서는 안 되는 여대라는 안전 공간을 위협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소위 ‘생물학적 여성’ 중심주의는 지난해 ‘불편한 용기’ 혜화역 집회에 등장해 많은 고민을 안겨준 이데올로기다. 생물학적 구분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많은 학자들이 이미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성별 이분법을 반대한다면서 이분법에 완고히 고착된 편견으로 트랜스젠더를 반대하고 있다. 이들이 낸 성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트랜스젠더 여성이 남성으로 태어났으면서 여성의 지위를 넘본다는 것이다. 성별은 바꿀 수 없는 것이어야 하고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위협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주장과 다름없다.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숙명여대는 태어날 때 이미 남성인 모든 교수를 파면하고 모든 학내 교직원들을 여성으로 교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누가 그러한 퇴보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안전은 배제와 혐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만큼 우리 사회는 성숙하고 있다. 소수자를 포용하고 환대하는 일은 사회 전체를 보다 안전한 공간으로 만든다. 숙명여대 동문들을 비롯한 동료 학생들과 시민들이 트랜스젠더 입학생 A씨를 환영하고 격려하는 일에 속속 나서고 있다. A씨가 트랜스젠더임을 굳이 밝힌 이유가 변희수 하사를 지지하고자 하는 연대의 마음이듯 A씨의 입학을 환영하는 마음은 A씨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넘어 우리 모두의 인간성을 지지하는 일이 된다. 정말로 안전하기를 바라는가? 혐오를 거두고 손을 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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