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 영화계 젠더 평등의 미래를 보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0.02.08 14:00
  • 호수 1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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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스웨덴 예테보리국제영화제 르포…전 세계 가담하는 키워드 '젠더 이퀄리티'가 목표

젠더 이퀄리티(gender equality). 제43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1월24일~2월3일)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을 뿐 아니라, 스웨덴 영화산업을 시작으로 전 세계가 가담하고 있는 키워드다. 2020년까지 영화계 젠더 평등 비율 ‘50 대 50’을 이룬다는 목표를 위해 스웨덴 영화진흥원 SFI(Swedish Film Institute)가 지난 2016년 칸국제영화제를 통해 발표한 비전이 바로 ‘50/50X2020’이다. 올해가 해당 연도니만큼, 스웨덴에서는 이미 연초부터 그간의 부지런한 노력들이 확인되고 있었다. 스웨덴 대외 홍보처 SI(Swedish Institute)가 예테보리국제영화제 기간 중 전 세계 8개국 기자들을 초청한 미디어 프로그램에 참여해, 산업 전체가 영화계 젠더 평등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스웨덴의 전략을 들을 수 있었다. 젠더 평등은 왜 중요한가.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예테보리국제영화제 메인 극장 Draken ⓒ 예테보리영화제·스웨덴 영화진흥원
예테보리국제영화제 메인 극장 Draken ⓒ 예테보리영화제·스웨덴 영화진흥원

영화산업, 한쪽 눈을 가리고 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기차로 3시간쯤 달려가면 스웨덴 제2 도시이자 항구도시인 예테보리(Gteborg)에 닿는다. 이곳에서 매년 열리는 예테보리국제영화제는 올해로 43회를 맞았다. 북유럽을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국제영화제다. 영화제 측은 올해 89개국 357편의 영화를 선보였다. 11일간 열린 축제에서 노르딕, 국제영화 등 경쟁부문 상영작들은 영화제가 수여하는 드래건 어워즈(Dragon Awards)의 상금을 놓고 경합을 벌였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방송산업을 논하는 TV 드라마 비전,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노르웨이 등을 포함하는 북유럽 전체에서 제작하는 영화들과 바이어를 연결하는 노르딕 필름 마켓 역시 열렸다.

예테보리국제영화제는 올해 ‘50/50 비전(50/50 Vision)’을 전체 기조로 내걸었다. 아직까지 할리우드에서는 전체 영화감독의 96%가, 유럽 전역에서는 전체 영화감독의 81%가 남성이다. 영화제 측은 이 수치가 “영화산업이 한쪽 눈을 가린 채 스스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온전한 상태 그대로 영화와 세상을 보기 위해 영화제 상영작의 절반을 여성들의 영화로 선별했고, 이 계획에 ‘50/50 비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명이다. 영화제 CEO인 밀리아 베스터와 예술감독 요나스 홀름베리가 한쪽 눈을 가린 안경을 낀 채 상영관 안에 앉아 있는 사진은 영화제의 이 같은 생각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성 중심의 제한적 관점으로 인해 업계 전체가 지배적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이미지’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영화제의 재미있는 실험 중 하나는 스웨덴의 감독이자 배우인 안나 오델의 인터랙티브 시네마 《부인과 영화 의자(the gynecological cinema chair)》였다. 산부인과에서 여성들이 부인과 검진을 받을 때 앉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나 오델은 《시험(Underskningen)》이란 작품을 위해 이른바 스웨덴 권력층의 남성들을 초대한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얀 기유, 전 법무부 장관인 토마스 부드스터럼, 신문사 달라 데모크라텐의 편집장 요란 그레이더, 전 인터폴 책임자 비욘 에릭손 등이다. 이들은 오델과 함께 평등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 부인과 검진으로 대표되는, 오직 여성들만 겪었던 경험을 체험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오델은 이 실험을 통해 ‘권력을 지닌 남성들의 힘과 취약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생각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취약점을 보여주면 무언가를 잃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부인과 검사를 선택한다면 젠더 공감의 상징적 행동으로 볼 수 있을까. 만약 거절한다면 왜일까. 영화제 기간 동안 이 체험 공간을 찾은 관객들 역시 위 대화의 영상을 보다가, 그들과 같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부인과 영화 의자》는 그렇게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체험으로서의 젠더 문제를 논하는 것이다.

영화제 측은 이 영상의 일부를 리더 필름으로 사용, 매 작품 상영 시작 전에 관객에게 선보였다. 검사를 위해 다리를 벌리고 부인과 의자에 앉는다는 경험 자체가 남성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오델의 답변은 재치가 넘친다. “오히려 익숙할 수 있다. 남성들은 어디에서나 종종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지 않나. 그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면 되는 것뿐이다.”

밀리아 베스터(왼쪽), 요나스 홀름베리의 50/50 비전 홍보 사진 ⓒ 예테보리영화제·스웨덴 영화진흥원
밀리아 베스터(왼쪽), 요나스 홀름베리의 50/50 비전 홍보 사진 ⓒ 예테보리영화제·스웨덴 영화진흥원

50/50X2020을 위한 스웨덴의 노력

예술감독 요나스 홀름베리는 이 전시 작품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영화적 경험”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상영작으로서, 체험으로서 영화제가 젠더를 논해야 하는 이유를 “영화는 새로운 세계와 관점을 열어주는 최고의 매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제작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며, 평등에 대한 논의는 결국 “산업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올해 예테보리영화제는 자체적으로 세운 목표에 도달했다. 상영작 중 여성 감독의 비율은 총 48.3%. 남성 감독과 공동 작업한 경우인 5.6%를 더하면 50%를 웃돈다. 이뿐만 아니라 프로듀서, 작가, 촬영감독, 주연배우 등 주요 부문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예테보리국제영화제는 SFI가 제시하고 세계의 다양한 국제영화제들이 동의한 ‘50/50X2020’ 목표에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도달한 첫 번째 영화제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단순히 기계적인 중립을 맞춘 것은 아니다. 노르딕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여성 감독들의 작품은 성과를 인정받을 만하다. 마리아 백 감독이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스톡홀름의 정신병(Psychosis in Stockholm)》, 《사미 블러드》(2016)로 이름을 알린 아만다 커넬이 이혼 후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한 불안정한 어머니의 선택을 따라가는 신작 《전세(Charter)》 등의 면면이 인상적이다. 홀름베리는 올해의 상영작들을 두고 “젠더 균형을 달성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고, 심지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라인업”이라고 설명한다. 예테보리를 시작으로 다른 많은 국제영화제들이 이에 동참하길 바라는 것은 물론이다.

올해 예테보리가 적극적으로 총대를 멘 것은 스웨덴의 영화진흥원인 SFI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2011년부터 안나 세르네르가 대표를 역임하면서 ‘젠더 이퀄리티’는 이 기관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됐다. 그는 201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50/50X2020 비전을 발표해 영화 제작에서 젠더 평등 문제에 대한 국제적 인식을 높였고, 2018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주관한 ‘Take Two: Next move for #MeToo’ 행사에 총 5개국 문화부 장관이 참석하면서 국제적 수준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여성 영화 인력이 없다’는 편견에 맞서 여성 영화인 역사를 기록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북유럽 여성 영화인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노르딕 위민 인 필름’(www.nordicwomeninfilm)을 선보였고, 언론과 적극적으로 접촉했다. 변호사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SFI로 오기 전에 스웨덴광고협회(Swedish Advertising Association)와 스웨덴언론사협회(Swedish Media Publishers’ Association)의 책임자 역시 거쳤다. 스스로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여성이었고 불평등에 민감했다”고 소개한다.

영화제의 재미있는 실험 중 하나는 스웨덴의 감독이자 배우인 안나 오델의 인터랙티브 시네마 《부인과 영화 의자(the gynecological cinema chair》였다. ⓒ 예테보리영화제·스웨덴 영화진흥원
영화제의 재미있는 실험 중 하나는 스웨덴의 감독이자 배우인 안나 오델의 인터랙티브 시네마 《부인과 영화 의자(the gynecological cinema chair》였다. ⓒ 예테보리영화제·스웨덴 영화진흥원

여성의 권리만을 위한 것? NO!

“2006년에서 2010년 사이 여성 영화인에게 지원한 SFI의 금액은 불과 26%였다. 74%가 남성에게 갔다는 얘기다. 조사해 보니 남성은 남성의 이야기를 하고, 여성은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와 젠더 평등을 위해 더 이상 대화를 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액션 플랜’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세르네르는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대이변(catastrophe)’을 예고했다.

그 결과가 2015년부터 브랜딩 전략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50/50X2020’이다. “공격적인 지원 전략을 펼친 뒤 2017년 스웨덴 영화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더 스퀘어》)을 포함해 국제무대에서 네 번의 중요한 수상을 기록했고, 이 중 두 영화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사람들이 젠더 평등은 어렵다고, 어떻게 시작하느냐고 한다. 나를 보고, 우리가 제시하는 수치를 봐라. 불가능하지 않다.”

국가 지원금과 영화 티켓 비용의 10% 등을 지원받던 SFI의 자금 운용은 2017년 이후 전액 국가 지원으로 변경됐다. 매년 개발 및 프로덕션을 위해 약 3200만 유로(약 417억원), 배급을 위해 약 150만 유로(약 20억원)를 투자한다. 지난해 SFI 펀딩 지원 건수는 1400건에 달했다. 매년 젠더 평등 보고서를 내는 것 역시 SFI가 꾸준히 젠더 이슈를 파악하는 방식 중 하나다.

2018년 리포트의 주제는 ‘돈(money issue)’. 이 보고서를 통해 여성 영화인들이 큰 예산 작품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수치로 파악했고, 지난해 SFI는 제작비 300만 유로(약 39억원) 이상의 영화를 만들도록 장려하기 위해 여성 각본가에게 30만 유로(약 4억원)를 지원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총 18개월 동안 10개의 최종 지원 아이디어 중 3~4개의 프로젝트를 가리는 이 제도에 대해 세르네르는 “아직 시험 단계”라면서 “대형 예산 영화를 만들려는 여성 영화인을 지원하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 Jessica Hanlon
ⓒ Jessica Hanlon

지원 역시 기계적 중립의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로 꼭 만들어야 하는 가치 있는 이야기인가, 동시대와 어떤 연관성을 가질 것인가는 중요한 이슈다. 자전적 이야기를 쓰는 건 예술가로서 기본적인 시작점이지만 당신이 공동체의 일부이며, 카메라는 삶을 보여주는 다양한 관점의 일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여성인데 왜 내가 지원에서 불합격했나’라고 묻는다면, 이야기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세르네르의 말이다. 오는 3월 발표될 SFI의 2019 리포트 주제는 유색인종 여성들로 시각을 넓힌 ‘어떤 여성들(What Women)?’이다.

예테보리영화제는 매년 영화 및 방송 분야의 동향을 파악하고 예측하는 ‘노스트라다무스 리포트’를 발표해 왔다. ‘창의성의 폭발적 증가(A Creative Explosion)’라는 올해의 주제 안에서도 젠더 평등 이슈는 중요한 소주제였다. ‘50/50X2020’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영국 채널 4, 노르웨이 영화진흥원 기관장 등 동시대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영화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들이 “업계의 결정이 전문화됐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젠더 평등을 위한 노력은 장애인, LGBT, 흑인 및 아시아 소수민족에 대한 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며, 결국 조직과 업계의 파이프라인을 바꿔가는 첫 단추라는 얘기다. 스웨덴을 포함한 전 세계의 움직임이 단순히 여성의 권리만을 위한 노력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들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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