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92년 아카데미의 역사를 바꿔놓다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7 10: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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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다양성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원년’ 분석…《기생충》으로 언어의 장벽도 허물어

역사가 새로 쓰였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지난 2월9일(현지시간)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까지 4관왕을 기록했다. 아카데미 92년 역사에 비춰보더라도 괄목할 만한 변화다. 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것도 최초, 연기상을 제외한 주요 부문 역시 싹쓸이하다시피 한 것도 최초다. 봉 감독이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로컬(Local)’로 칭하며 화제를 모았던 아카데미에서 한국 ‘로컬’ 자본과 인력으로 만든 《기생충》이 최고의 영예를 누린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2월2일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며 기뻐하고 있다. ⓒAP 연합
봉준호 감독이 2월2일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며 기뻐하고 있다. ⓒAP 연합

시상식을 쥐락펴락한 《기생충》

“이 순간 굉장히 의미 있고 상징적인, 시의적절한 역사가 쓰인 기분이 듭니다.” 작품상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른 《기생충》의 제작사 바른손이엔에이 곽신애 대표는 영화 속 대사들을 인용해 이렇게 표현했다. 지난해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이후 이번 아카데미까지 이어진 긴 레이스의 마무리로 안성맞춤인 표현이었다.

그만큼 《기생충》을 둘러싼 이번 시상식의 양상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기생충》은 시상식이 있기 전 작품상 등 총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것부터 화제를 모았다. 일찌감치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던 부문은 국제장편영화상. 앞서 각본상부터 수상작으로 호명된 것도 이례적이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제작된 영화가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것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2003) 이후 17년 만이며, 아시아 영화의 수상은 최초다. 봉준호 감독은 각본을 함께 작업한 한진원 작가와 함께 무대에 올라 “국가를 대표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니지만 이건 한국의 첫 오스카”라며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한진원 작가가 “제 심장인 충무로 모든 영화 제작자와 스태프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소감을 남기는 동안, 뒤에서 봉 감독이 트로피를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국제장편영화상 역시 《기생충》의 차지였다. 지난 1월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2월2일 열린 제73회 영국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차지하며 수상이 유력했던 터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1인치(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소감을 남기며 화제를 모았던 봉 감독은 아카데미 무대에서는 “외국어영화상에서 국제장편영화상으로 처음 이름이 바뀐 상을 받게 돼 감사하다”며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데, 오스카가 추구하는 가치에 지지를 보낸다”는 소감을 남겼다. 지난해까지 외국어영화상으로 불린 이 부문은 각 나라에서 출품작을 결정해 경합을 벌이는 방식으로 수상작을 가린다. 그간 한국은 1963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시작으로 《기생충》까지 총 31번 출품했다. 봉 감독의 영화 중에는 《마더》(2010)가 출품된 이력이 있고, 지난해에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출품됐지만 본선 진출은 불발됐다.

이어 감독상 수상을 위해 다시 한번 무대에 오른 봉 감독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소감을 이어갔다. 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영화를 공부했다며 그를 향한 존경을 표했고, 미소로 화답하는 스콜세지를 위해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봉 감독은 함께 감독상에 오른 후보이자 자칭 “미국에서 아무도 내 영화를 모를 때부터 지지를 보내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에게는 “아이 러브 유”라는 말로 특별한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또한 “오스카가 허락한다면 텍사스 전기톱으로 트로피를 5등분해서 나누고 싶다”는 재치 있는 소감으로 함께 후보에 오른 샘 멘데스(《1917》), 토드 필립스(《조커》) 감독에게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감독상 수상 장면은 아카데미 시상식 전체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한 최고의 순간으로 꼽힌다. 현장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봉 감독의 매력적인 화술은 그가 지난해 8월 본격적인 오스카 캠페인을 시작하며 단연 화두에 올랐던 장점이기도 하다. 지적이고도 유머러스한 말솜씨로 봉 감독이 각종 영화제와 시상식, 인터뷰에서 남긴 말들은 그의 팬덤을 지칭하는 ‘봉하이브(Bonghive)’를 부추긴 일등공신이다.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그 매력이 십분 발휘됐다는 평가다.

그리고 대망의 작품상마저 《기생충》의 차지였다. 《포드 V 페라리》 《아이리시맨》 《조조래빗》 《조커》 《작은 아씨들》 《결혼 이야기》 《1917》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까지 쟁쟁한 작품들과 경합을 벌인 결과다. 작품상 수상에는 봉준호 감독과 시상식에 참여한 《기생충》 팀 전원, 곽신애 대표와 투자배급을 담당한 CJ ENM 이미경 부회장이 책임프로듀서(CP) 자격으로 무대에 올랐다. 이 부회장은 “불가능한 꿈을 이루게 됐다”며 감격을 표했다. 작품상 부문의 가장 강력한 후보 중 하나로 점쳐졌던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은 촬영상(로저 디킨스), 시각효과상, 음향믹싱상까지 기술 부문 3개 상을 가져가는 데 그쳤다.


이미경 부회장 ‘오스카 캠페인’도 주효

이번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에는 이 부회장이 주도한 ‘오스카 캠페인’ 역시 주효했다는 평이다. 약 8400명의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아카데미를 위해 할리우드 주요 스튜디오들은 시상식 전해 8월부터 공격적인 프로모션을 시작한다.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기생충》이 이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CJ는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 네온(Neon)과 역할을 나누어 수백 건에 달하는 외신 인터뷰, 시사회, 유명 인사들 초청 파티 등으로 ‘표심 잡기’에 나서며 아낌없는 투자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시상식은 해시태그 ‘#Oscarssowhite(오스카는 너무 하얗다)’, 여성 영화인을 배제한다 등의 비판을 받아온 아카데미가 다양성을 더욱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원년 무대였다는 분석을 낳았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는 최근 5년간 《노예 12년》 《문라이트》 《그린 북》 등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의 이야기가 꾸준히 작품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기생충》으로 언어의 장벽까지 허물었다는 의미가 있다. 외신 역시 ‘세계의 승리(A win for the world)’(AP통신), ‘보다 포용력 있는 오스카가 약속되다’(월스트리트저널) 등으로 이번 시상식을 갈음했다.

한편 올해 아카데미의 연기상 부문에는 이변이 없었다. 당초 유력한 수상자로 거론됐던 배우들에게 트로피가 돌아간 무난한 결과였다.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와 《주디》의 르네 젤위거가 각각 남녀 주연상을 수상했고, 《원스 어폰 어 타임…인 할리우드》의 브래드 피트와 《결혼 이야기》의 로라 던이 각각 남녀 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브래드 피트는 그의 배우 인생을 통틀어 연기 부문으로 받은 최초의 오스카 트로피라 더욱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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