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억원대 송현동 부지, 시장에서 찬밥 대우 받는 이유
  • 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gil@sisajournal-e.com)
  • 승인 2020.02.20 14: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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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인사동·안국동 인접한 ‘금싸라기 땅’…각종 규제로 22년째 공터로 방치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4m 높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터가 있다. 한진그룹이 보유한 송현동 부지다.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만큼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1915년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장인 윤택영의 사저로 쓰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의 사택이 들어섰다. 조선식산은행은 산업은행의 전신으로 당시 산업금융을 담당하던 특수은행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의 사택은 해방 이후 적산가옥이 됐는데, 1980년대까지 미국대사관 직원의 숙소로 활용됐다.

송현동 부지가 민간으로 넘어온 시기는 1997년이다. 삼성생명은 국방부로부터 해당 부지를 1900억원에 매입했다. 이후 2002년 대한항공이 삼성생명에 2900억원을 주고 다시 사들였다. 송현동 부지는 두 번의 손바뀜이 일어났음에도 매번 개발계획이 무산되면서 20년 넘게 방치돼 왔다. 최근 땅 주인인 대한항공이 매각에 나서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대한항공이 최근 5000억원대로 평가되는 송현동 부지(사진)의 매각에 착수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시사저널 고성준
대한항공이 최근 5000억원대로 평가되는 송현동 부지(사진)의 매각에 착수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시사저널 고성준

대한항공 7성급 호텔 추진하다 ‘좌초’

이 땅의 가치는 5000억원대(3.3㎡당 4500만원)로 추산된다. 광화문과 인사동, 안국동 등이 인접해 있어 ‘금싸라기 땅’으로 꼽힌다. 하지만 부동산업계에선 이곳이 서울 중심부라는 입지적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매수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동안 각종 규제로 인해 개발이 제대로 진행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소유권이 민간으로 넘어온 이후에도 서울 알짜배기 땅이 22년째 불모지로 남아 있던 이유다.

대한항공은 과거 해당 부지에 지상 4층 규모 ‘7성급 한옥형 특급호텔’ 건립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학교 주변에 호텔을 지을 수 없도록 한 ‘학교보건법’에 부딪혀 무산됐다. 현재 부지 주변에는 풍문여고와 덕성여중·고 등 3곳이 붙어 있다. 갈등은 교육청과의 행정소송으로까지 번졌지만 대한항공은 2012년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이 밖에도 송현동 부지에는 규제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고도지구에 속해 건축물 높이는 16m 이하로 제한된다. 제1종 일반주거지역이라 건폐율은 60% 이하, 용적률은 100~200%로 묶인다. 주거지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용적률이다. 4층 이하의 단독주택과 공동주택, 제1종 근린생활시설,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노유자 시설의 설립만 가능하다. 또 인근에 학교가 많아 상대적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상태이며, 경복궁 옆에 있어 문화재 보존영향 검토대상 구역이기도 하다.

규제만 있는 게 아니다. 송현동 부지를 매입한 민간 기업은 향후 인허가 과정도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송현동 부지는 특별계획구역으로 묶여 있다. 이에 따라 허용받은 용도 내에서 건축물을 짓더라도 개발계획은 서울시의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현재 서울시와 종로구는 해당 부지를 공원화하고, 시민 편의시설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다. 민간과 공공의 개발 방향성이 다른 만큼 심의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한진그룹이 송현동 부지를 매물로 내놓은 배경에도 서울시의 규제가 있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제1종 일반주거지역은 주로 단독주택이나 다세대주택 정도만 가능하다”며 “서울시가 용도를 바꿔주지 않는 한 4층 이하의 주택만 지을 수 있는데 매수자들이 나타날지는 미지수”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서울시와 종로구가 이곳을 공원화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만큼 향후 개발을 진행하더라도 인허가 과정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송현동 부지를 매입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서울시와 종로구 역시 개발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종로구는 지난해 6월 토론회를 열어 송현동 부지에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와 같은 숲을 조성하고,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역시 “기본적으로 (송현동 부지는) 민간이 개발해서는 안 되는 땅”이라면서 “일부는 공원화하고, 일부는 전통문화를 함양하는 시설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종로구의 입장에 힘을 실었다.

 

서울시·종로구, 재원 마련 두고 ‘핑퐁게임’

문제는 두 기관 모두 부지를 매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점이다. 현재 송현동 부지의 매입가는 5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종로구의 한 해 예산이 4000억원 규모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구 예산으로는 매입이 불가능하다. 종로구는 정부와 서울시가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정부가 나서야 할 일이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서울시는 ‘공원일몰제’로 불리는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 실효제’가 진행됨에 따라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33㎢ 규모 도시공원 사유지를 사들인다는 계획이다. 땅 주인들이 올해 7월부터 공원 예정지에 건물을 올릴 수 있는 만큼 해당 토지 매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배정된 예산은 1조4900억원이다. 이마저도 1조2900억원을 지방채 발행으로 메우는 상황이라 송현동 부지에 수천억원의 비용을 지원하기는 부담스럽다. 다만 서울시는 정부와 서울시가 7 대 3 비율로 매입할 수 있다면 공동 매입을 고려해 보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와 종로구의 연이은 ‘러브콜’에도 정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종로구 지역구 의원이던 정세균 국무총리도 나섰지만 정부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송현동 부지의 공익적 활용을 주장해 온 정 총리는 2018년 10월 종로구청이 개최한 토론회에 참석해 “경제부총리에게 일단 매입하고 순차적으로 분할 상환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냐고 얘기했지만 아직까지 동의를 얻지 못했다”며 “문화체육관광부가 민속박물관 이전 부지를 찾고 있지만 이 땅이 원체 비싼 토지여서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업계에선 민간 기업과 지자체 모두 장기적인 안목에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개발계획이 세밀하지 못한 가운데 매입·매각이 반복되면서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땅이 계륵으로 전락한 모습”이라며 “정치권에서도 실현 불가능한 얘기를 가지고 공수표를 날릴 게 아니라 토지 소유주 등 이해관계자들과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을 짜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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