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봉준호의 젊은 날
  • 소종섭 편집국장 (jongseop1@naver.com)
  • 승인 2020.02.17 09: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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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젊은 날은 격정의 시간입니다. 때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때로는 세상을 다 잃은 듯 감정이 일렁이는 나날들입니다. 청춘의 특권이자 아픔입니다.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보면 다 인생의 거름이 됐지만 그때는 자못 비장합니다. 울분을 토해 냅니다. 넘어지고 좌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다시 일어섭니다. 이처럼 많은 경우에 젊음의 열정과 고뇌는 세상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됩니다. 과거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젊은 날도 그랬습니다. 연세대 사회학과 3학년생이던 1990년 여름, 친구들과 농촌봉사활동(농활) 답사를 떠나기로 한 날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날 그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들의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화염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예나 이제나 그의 영화에서 보이는 짙은 사회성의 바탕에는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우리나라는 뭐 하나 원칙대로 되는 게 없어요”나 《살인의 추억》의 “밥은 먹고 다니냐”, 또 《기생충》의 “부자인데 착한 게 아니고 부자라서 착한 거야” “돈이 다리미라구. 돈이 주름살을 쫙 펴줘” 같은 대사들이 상징적입니다. 굳이 안 넣어도 될 시위 장면을 영화에 넣는다거나 신문, 방송 뉴스를 노출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시대와 동떨어진 세상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봉테일(봉준호+디테일)’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 봉 감독의 섬세함은 영화계에서 유명합니다. 젊은 날에도 그랬습니다. 월간 ‘참여사회’ 2003년 6월호에는 지인이 회고한 봉 감독의 대학 시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봉 감독의 빼어난 감각은 관찰력과 취재력 덕분에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남들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이야기들을 잘 새겨두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끌어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곤 했다.” 대학 재학 시절 학보에 ‘연돌이와 세순이’라는 만화를 연재하며 선보였던 치밀하고 날카로운 감각이나 사회학과 학회지에 그렸던 ‘농활야사’(위)는 지금도 학창 시절 그를 아는 이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봉 감독은 이제 세계 영화계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영화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늘 성공만 한 것은 아닙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그가 제작을 맡았던 영화 《해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는 울음을 터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바탕 삼아 다시 일어섰습니다. ‘청년 봉준호’는 지금도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미 선을 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봉준호를 이번 호 커버스토리로 보도한 이유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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