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역사’를 향해 나아간 도전과 창조의 궤적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7 08:00
  • 호수 158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유의 영화 문법으로 예술성․흥행성 인정…세계 영화산업 ‘게임 체인저’ 될지 주목

‘봉준호 자체가 곧 장르다’(BBC), ‘우리는 봉준호의 세계에 살고 있다’(뉴욕타임스), ‘아티스트적인 면모와 엔터테이너적인 면모를 갖춘 천재’(카이에 뒤 시네마)…. 봉준호 감독이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4관왕을 차지하면서 나온 외신 반응이다. 전 세계에 ‘봉준호 신드롬’이 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69년 대구에서 태어난 후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미대 교수이자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영화나 만화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일각에서는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천변풍경》 등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의 한 획을 그었던 소설가 박태원씨의 피를 물려받은 것 아니겠냐고 말한다. 봉 감독의 어머니가 바로 박태원 소설가의 차녀이기 때문이다.

2016년 영화 《옥자》 촬영현장에서 봉준호 감독이 지시를 하고 있다. ⓒ넷플릭스
2016년 영화 《옥자》 촬영현장에서 봉준호 감독이 지시를 하고 있다. ⓒ넷플릭스

“예술적 기질, 아버지 영향이 컸다”

하지만 봉 감독은 “외할아버지보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릴 때 아버지 방에 가 보면 외국에서 사온 디자인책이나 화집, 사진집이 많았다. 이 책을 몰래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며 “그때의 기억과 흥분이 영화를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은 연극영화과가 아니라 연세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영화는 예술로 간주되지 않았다. 부모님을 실망시킬까봐 어쩔 수 없이 사회학과를 택했다는 것이 봉 감독의 설명이었다. 봉 감독은 군 전역 후 영화 동아리인 ‘노란문’을 만들었다. 그의 첫 단편영화인 《백색인》도 이때 만들었다.

봉 감독은 1994년 한국영화아카데미 11로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다. 2년 과정을 이수하는 동안 《프레임 속의 기억》과 《지리멸렬》 등 단편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특히 《지리멸렬》의 경우 밴쿠버와 홍콩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아카데미 졸업 후 충무로에서 경험을 쌓았다.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 《모텔 선인장》 《유령》 등의 조연출이나 각본을 하면서 한국영화계에 조금씩 그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돈 문제였다. 1995년 결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봉 감독 스스로 “2003년 《살인의 추억》 개봉 때까지 굉장히 힘들었다. 대학 동기가 집에 쌀을 갖다주기도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봉 감독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비디오 가게 창업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의 눈에 띄었고, 31세의 어린 나이에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영화 감독에 데뷔한다. 이때가 2000년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데뷔작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봉 감독은 위기에 처한다. 충무로에서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봉 감독의 재능을 아꼈던 차 대표는 다시 한번 기회를 줬고,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대박을 터트렸다. 작품성과 함께 흥행성을 인정받으면서 그만의 영화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봉 감독은 2006년 《괴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당시 한국영화계에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테크놀로지 강한 작품을 우리는 못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봉 감독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 규칙을 벗어난 자신만의 영화 장르를 시도했는데, 또다시 대박을 터트렸다. 그해 《괴물》은 관객 수 1300만 명을 돌파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도 ‘괴물류’의 환타지 영화가 통할 수 있다”는 인식을 영화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봉 감독은 2009년 《마더》와 2013년 《설국열차》를 잇달아 흥행시키며 자신만의 영화 문법을 완성시켜 나갔다. 해외 영화제 시상도 잇따랐다. 《마더》의 경우 아시아 필름 어워드 최우수 각본상과 최우수 작품상, 뮌헨국제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미국여성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등을 휩쓸었다.

《해무》로 영화 제작 참여했다 큰 손실 입기도

봉 감독은 2013년 《설국열차》를 통해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다. 갑작스럽게 닥친 빙하기로 1001량 기차가 지구의 유일한 생존처가 된다는 독특한 설정이었다. 이 영화는 그해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도빌미국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을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봉 감독은 그해 미국 보스턴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과 디렉터스 컷 어워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내친김에 봉 감독은 제작에도 나섰다. 2014년 영화 《해무》를 통해서였다. 2001년 10월 중국인과 재중교포 60명이 여수로 밀입국하다 질식사하자 바다에 버려진 제2 태창호 사건이 이 영화의 모티브였다. 봉준호 감독이 처음 제작을 맡았는데, 흥행에 실패했다. 익명을 요구한 충무로의 한 관계자는 “과거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가 《플란다스의 개》 흥행 실패로 위기에 빠진 봉 감독을 도와준 적이 있다. 봉 감독 역시 한국영화계에 공헌하는 차원에서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며 “하지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봉 감독은 2019년 개봉한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 감독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로 지난해와 올해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상만 현재 180여 개에 이른다.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의 경우 한국영화 101년 역사상 처음이었고, 아카데미 작품상은 92년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어영화가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봉준호 감독이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로 역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과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등에서 흥행몰이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기생충》이 전 세계에서 거둔 티켓 수입은 1억6500만 달러(약 2000억원)다. ‘아카데미 효과’에 따라 이 수입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연예매체 할리우드 리포터는 “《기생충》이 세계 영화산업의 게임체인저가 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