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 通했다…보편성 획득한 ‘봉준호 월드’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7 10:00
  • 호수 1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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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는 난공불락 아카데미를 어떻게 공략했나

이제 한국 영화사는 2020년 2월9일(현지시간)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됐다. 역사의 기준점은 만 50세의 봉준호 감독이다. 봉 감독의 일곱 번째 장편영화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까지 모두 4개의 트로피를 안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됐다.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비(非)영어 영화가 최고상인 작품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시아 영화로는 각본상, 국제영화상도 모두 최초다. 보수적인 감독상도 아시아 감독으로는 대만 감독 리안(李安)에 이어 두 번째다. 

앞서 《기생충》은 지난해 5월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인 칸영화제에서 한국영화 100년 역사상 최초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동안 한국 감독이 경쟁·비경쟁 부문 포함, 1980년대부터 이번까지 열두 번이나 문을 두드린 상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것은 1956년 나온 미국 영화 《마티》 이후 두 번째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생충》은 새해 들어서만 미국에서 전미비평가협회 작품상과 아카데미상과 쌍벽을 이루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등을 받았다. 영국아카데미상 시상식 ‘오리지널 각본상’과 ‘외국어영화상’이라는 쾌거도 있었다. 한국영화가 유럽과 미국 등 주류 국제무대에서 이렇게 연속해서 큰 영예를 누린 것은 사상 처음이다. 한국영화 101년 역사상 가장 빛나고 놀라운 순간이다. 

2월9일  LA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2월9일 LA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런 연이은 수상, 특히 봉 감독의 아카데미 시상은 무슨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동안 한국영화에 아카데미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앞서 한국영화는 칸, 베를린, 베니스와 같은 3대 국제영화제에서 수차례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지만 시장 친화적이고 미국 중심적인 아카데미의 벽은 유독 넘지 못했다. 《기생충》 전까지는 시상은커녕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김춘수의 시 《꽃》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명명되지 않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최소한 미국 영화계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이 말인즉 여전히 한국영화는 세계 영화의 주류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봉 감독은 이 질곡의 역사 물줄기를 바꿔놓는 데 성공했다. 영화의 본류로 평가받는 할리우드가 ‘봉준호’라는 이름을 호출한 것은 ‘봉준호 월드’가, 그리고 한국영화가 명실상부하게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봉 감독의 이런 위대한 성취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러 분석이 있다. 우선 안정적인 시도보다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거듭해 온 봉 감독이 꾸준히 축적해 온 평판이 있다. 그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을 ‘봉테일리즘’이라 불린 ‘섬세한(detailed)’ 기획과 대중성을 잃지 않는 연출로 그려내면서 작품성과 상업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영리한 감독이라는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다.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는 평가는 영화감독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에 가깝다. 

ⓒAP 연합
ⓒAP 연합

하나의 장르가 된 봉준호, 보편성까지 획득 

이런 탄탄한 주춧돌 위에서 유럽과 미국 시장을 꾸준히 노크하며 그곳 관객·평단의 시선을 끌고 그들과 인연을 쌓아갔다.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으로 한국 시장을 평정한 봉 감독은 2013년 《설국열차》를 다국적 프로젝트로 진행하며 할리우드에 처음 진출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7년에는 넷플릭스 투자를 받아 《옥자》를 만들며 새로운 영화산업 플랫폼에 도전했다. 봉 감독은 다 계획이 있었다. 

무엇보다 봉 감독의 힘은 ‘보편성’에서 나온다. 먼저 주제의 보편성이다. 《기생충》은 빈부격차와 양극화라는 세계 각국에서 심화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보편적 주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당대 한국 사회의 계급적 갈등을 그린 ‘가족 희비극’이 동시대 세계 영화인들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 것은 봉 감독이 다룬 주제가 ‘세계인들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이다운 충남대 강사는 ‘영화 《기생충》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불평등한 계급 구조가 양산하는 부조리는 전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문제다. 인간은 본래 평등하다는 전제를 신봉하는 민주주의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실현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다수 나라에서 부의 불공정한 재분배로 인한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생충》은 ‘국지적이지만 세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했다”고 분석했다.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 하나쯤은 나온다

특히 서구 사회의 《기생충》에 대한 호응은 심화되는 양극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다양성에 대한 요구 등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된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심화된 빈부 격차와 유색인종에 대한 배타성, 이민자 분리 정책 등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고조돼 왔는데, 이런 점이 《기생충》과 코드가 잘 맞아 공감을 끌어냈다는 분석도 있다. 즉 봉 감독의 《기생충》이라는 ‘명작’은 ‘때를 제대로 만나’기도 했고,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서 ‘세계적 작품’의 반열에 올라선 셈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저서 《21세기 자본》을 통해 부(富)의 불평등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다뤄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봉 감독의 영리함은 계급 갈등이라는 불편한 주제를 대중들이 정면으로 응시하게 하되, 공감할 수 있게끔 풀어냈다는 데 있다. 《기생충》은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를 다루면서도 블랙코미디와 스릴러 등을 넘나드는 장르의 변주 속에 대중성을 살린 것이 성공의 이유로 꼽힌다. 무엇보다 《기생충》은 상대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안전하게’ 보여준다. 체제의 전복과 같은 시도를 하지 않는 봉 감독의 《기생충》은 불편하지만, 외면할 정도는 아닌, 시대의 고민을 다룬 ‘재밌고 좋은 영화’가 된다. 

여기서 그치면 ‘봉테일’이 아니다. 《기생충》의 강점은 어떤 관객이라도 하나쯤은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제시했다는 데 있다. 《기생충》의 계급투쟁은 다층적으로 이뤄져 있다. 《기생충》에서는 계급 상승을 꿈꾸는 하층 계급의 욕망과 이들을 배제하고 선을 긋고 살고 싶은 상층 계급의 욕망이 부딪친다. 여기에 ‘반지하’와 ‘반지하 아래’ 계층 간의 ‘을(乙)들의 갈등’이라는 대립구도를 더했다. 이쯤 되면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공감하면서 스스로를 대입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는 나오게 된다. 역시 봉 감독은 다 계획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왜 봉 감독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마틴 스콜세지의 말을 가슴에 새긴다고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봉 감독의 영화에는 늘 ‘가장 개인적인 것’ 즉 계급, 계층, 인종, 성별 등에 관계없이 그 시대를 살아간다면 누구나 대입해 공감할 만한 주제와 스토리가 있다. 그렇게 ‘가장 창의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봉준호 매직’의 비결인 셈이다. 

봉 감독의 또 다른 무기는 ‘방법론의 보편성’이다. 《기생충》은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을 앞세우지 않고 국제 영화시장에서 한국의 시대상을 보여준 최신의 방식이다. 한국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신념 같은 담론이 있다. 이에 수십 년 전부터 우리 문화계에는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일 수 있을까”와 같은 논쟁이 지속돼 왔다. 

그리고 그렇게 임권택 영화 《서편제》처럼 딸을 한 맺힌 소리꾼으로 성장시키려고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하는 스토리가 한동안 이어져 왔다. 하지만 봉 감독의 이야기는 다르다. 세계를 홀렸던 이창동, 박찬욱 감독 등도 마찬가지다. 세계인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고민할 법한 주제를 던진다. 봉 감독 영화의 무대, 시공간만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 그 내용과 주제도 한국적이면서, 이를 다루는 방식도 충분히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1인치의 장벽이 허물어진 데는 이런 배경도 있다.  

 

대자본이 주도한 배급과 홍보의 힘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기생충》의 성공에는 CJ라는 국내 굴지 대기업의 자본이 대거 투입됐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역설적인 결과도 있었다. 국내 상영관의 상당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의 자본이 투입된 《기생충》의 국내 개봉 당시 스크린 독점 문제가 제기됐다. 이미경 CJ 부회장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밝힌 것에 대해서도 뒷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자본이 투입돼야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기생충》이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도 충분한 배급과 홍보가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미국 시장에 안착하기 쉽지 않았을 수 있다. CJ는 《기생충》의 오스카 홍보 등을 위해 100억원 정도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CJ의 자본은 분명 《기생충》을 역대 북미 외국어영화 흥행 6위에 올라서게 한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사실 《기생충》의 오스카 캠페인은 CJ에도 모험이었다. 《기생충》은 후보작 중 유일하게 미국 대형 제작사의 작품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상 후보 선정과 수상은 관객의 반응뿐 아니라 투표권을 가진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들의 표심을 사로잡아야 한다. 넉넉한 예산과 현지 사정에 밝고 경험 많은 인력, 글로벌 영화계 네트워크, 전략적 프로모션이 총동원돼야 한다. 상설 오스카 전담팀을 운영하는 할리우드 제작사는 대규모 자본과 강력한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어려운 경쟁이었다. 2017년 AMPAS 회원이 된 이 부회장은 이 과정을 뒤에서 후원했다. 

위대한 성취를 이뤘지만 과제도 남았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남들이 주는 상을 받고 기뻐하는 한국인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남들에게 상을 주는 주체가 되는 꿈을 꿔야 한다. 이젠 해처럼 우리 스스로 빛나는 발광체가 돼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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