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일등공신, 고려인삼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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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 총대 없는 ‘상인 독립군’ 인삼 장수, 이들이 펼친 ‘인삼 독립운동’의 숨은 이야기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날로 커지고 있다. 수출과 내수가 위축되고 호텔·백화점·영화관 등의 영업 중단 사태가 잇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와중에 정반대로 때아닌 특수를 누리는 곳들도 있다. 인삼 판매량도 전년 대비 40~60%나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현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개인의 면역 기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사포닌 성분이 풍부한 인삼은 면역력 증강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사스나 메르스 사태 때에도 홍삼 수요가 크게 늘었다고 하니 민족의 영약(靈藥) 인삼은 우리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인삼이 나라를 지키는 데에도 큰 몫을 한 사실이다. ‘고종실록’에는 ‘홍삼 1만5000근을 중국에 팔아 무기 구입에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중국에 건너간 애국지사들이 인삼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윤봉길 의사도 상하이에 첫 발을 떼고 인삼 행상에 나선 적이 있다. 고려인삼의 명성이 높아 수익이 컸던 데다 이동이 용이해 정보 수집에 유리한 때문이었다. 1919년 11월 ‘상해일일신문’은 “한인 독립투사들이 인삼 행상으로 위장해 양자강변에서 여러 차례 배일(排日) 연설을 행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인삼 행상들은 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상하이에서 규모가 큰 한인 상회로는 김문공사·해송양행 등을 꼽을 수 있다. 김문공사의 김시문(1892~1978)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 폭파를 시도한 의열단원들에게 도피 자금과 피난처를 제공했다. 또한 인삼 판매 이익금을 임시정부와 독립군 진영에 보내기도 했다. 해송양행을 세운 한진교(1887~1973)도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며 민족 교육기관인 인성학교 설립 비용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의 여비를 댔다. 지난 1월 필자가 미국 LA에서 만난 그의 외손자 이지호·지준 형제는 “독립군들은 군자금이 마련될 때까지 상점에 며칠씩 머물면서 마당을 쓸거나 애를 봐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한진교와 외손자 이지호(왼쪽)·지준. 오른쪽은 김시문과 고려인삼 글자가 새겨진 김문공사 간판
독립운동가 한진교와 외손자 이지호(왼쪽)·지준. 오른쪽은 김시문과 고려인삼 글자가 새겨진 김문공사 간판

이와 같이 ‘인삼과 독립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1922년 조선 총독부 경무국이 “고려인삼의 중국 수출이 한인 독립운동에 이용되는 것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일제는 인삼 상인에 대한 감시망을 점차 좁혀왔다. 1928년 3월 중국 푸젠성 샤먼(廈門)에 위치한 태백산인삼공사에 일경들이 들이닥쳤다. 임시정부 참사를 지낸 인삼 상인 정제형이 만든 이 회사는 홍콩·싱가포르를 왕래하는 한인 상인들의 거점이자 독립군 연락처였다. 이 일로 인삼 행상을 하던 4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두 사람은 국내로 이송되어 징역형에 처해졌다.

인삼 상인 출신으로 직접 의열 투쟁에 나선 이도 있었다. 박재혁(1895~1921)은 3년 동안 상하이와 싱가포르를 오가며 인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거사 자금을 마련했다.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한 그는 부산 경찰서에 폭탄을 터트려 일본인 서장을 폭사시키고 현장에서 붙잡혔다. 박 의사는 “왜놈 손에 죽느니 차라리 곡기를 끊겠다”며 단식으로 2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무렵 싱가포르·대만 등 동남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인삼 상인들은 무려 500여 명에 달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변변한 자원 하나 없던 조선에서 인삼은 거의 유일한 효자 수출품이었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1892년 고려인삼의 가격은 미국삼의 5배, 일본삼의 4배, 중국삼의 10배에 달해 금값과 맞먹을 정도였다. 고려 인삼의 뛰어난 효능과 가치를 무기로 한인 상인들은 중국·동남아를 넘어 북미 대륙에도 진출했다. 흔히 미주 이민의 시초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인삼 상인들이 미국 본토에 상륙했다. 미국 이민국 통계로는 1894년부터 1899년까지 약 150명의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 항을 통해 입국했는데, 그 가운데 90명 정도가 인삼 상인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인삼 판매에 나섰다.

인삼 상인들이 입국신고서에 목적지로 적은 한인 도매상 ‘광덕회사’ 영문 표기와 현재 건물 모습.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이곳은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삼을 판매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선시대 인삼 재배 모습
인삼 상인들이 입국신고서에 목적지로 적은 한인 도매상 ‘광덕회사’ 영문 표기와 현재 건물 모습.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이곳은 1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삼을 판매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선시대 인삼 재배 모습

재미있는 것은 1902년 10월 미국의 한인 인삼 상인이 ‘황성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여기에는 “한복을 입고 상투를 틀고 인삼을 팔면 값을 4배나 더 받았다”란 내용이 나온다.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가문을 일군 인삼 상인 강명화의 손자 강재신도 “한복을 차려 입고 인삼을 팔면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들었다”라고 전했다. 중국 상인들이 ‘짝퉁 고려삼’을 속여서 파는 터라 진짜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조선 복장을 갖춰 입었다는 얘기다. 인삼 상인들은 초기 이민 사회 정착을 위해 상항 한인교회 건립비용을 댔고 대동교육회를 만들어 민족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이 단체는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합쳐져 미주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로 발전되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들은 조국 독립에 힘을 보탰다. 그 중에서도 애국지사 방사겸(1881~1955)은 자신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한 ‘평생 일기’를 남겼다. 필자는 미국에 사는 그의 아들 데이빗 방을 만나 일기장을 살펴보았다. 고된 이민 생활의 소회와 함께 독립의연금·인구세를 낸 내역이 때 절고 빛바랜 공책 여러 권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기부 행적은 해방 후에도 수년 간 이어졌다. 이역만리에서 망국민으로 무시당하면서도 인삼 팔아 조국 독립과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보탰던 것이다. 데이빗 방은 “아버지는 미국 뿐 아니라 쿠바·자메이카 등 중남미 지역에도 인삼을 팔러 다녔다”고 술회했다

방사겸과 독립금 기부 내역이 적힌 그의 일기장. 오른쪽은 리들리의 한인 무연고 묘지와 박영순이 포함된 기부자 기념비
방사겸과 독립금 기부 내역이 적힌 그의 일기장. 오른쪽은 리들리의 한인 무연고 묘지와 박영순이 포함된 기부자 기념비

미주 대륙을 무대로 활동한 인삼 상인으로 박영순(1876~1957)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노예 생활에 신음하던 한인들을 구해낸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1907년 멕시코에 인삼을 팔러 갔다가 애니껜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의 처참한 실상을 고발한 것이다. 이 소식은 미국 한인단체를 통해 국내 언론에 게재되어 멕시코 농장 파견 사업이 중단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듯 인삼 상인들은 미주 이민 사회의 초석을 다졌고, 독립금을 바쳐 조국 독립과 건국에 힘썼으며 노예적 상황에 놓인 동포들을 구출하는 정보원 역할도 해냈다.

 

독립 전선 사각지대에 놓인 인삼 상인들의 공훈 발굴 이뤄져야

하지만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이들이 많다. 박영순도 마찬가지다. 그가 묻힌 미국 중가주 리들리의 공동묘지에는 많은 무연고 한인들의 묘가 있다. 대부분 1900년 전후로 미국에 건너간 노동자나 인삼 장수들이다. 이들도 박영순처럼 인삼 자루를 짊어지고 광활한 대륙을 오가는 고달픈 삶을 살았을 게다. 그럼에도 조국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고 독립금을 꼬박꼬박 냈다. 묘지 인근에 세워진 기념탑 뒷면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성금을 낸 이들의 이름이 새겨있다. 1918년과 1919년에만 75명이 1만3835달러, 현재 가치로 약 1억9000만 원을 냈다고 기록되었다.

인삼 상인들은 전세계 ‘진생 로드’를 누비며 동포들에게 독립투쟁 소식을 알리고 자신의 상점을 독립군 은신처로 제공했으며, 때로는 정보원 역할과 의열항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사로 얻은 이익을 나라 되찾는 일에 바치기도 했다. 독립자금은 항일운동의 심장부에 공급되는 혈액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지원되는 경우가 많아 상당 부분이 드러나기 힘든 실정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인삼 상인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다.

“흐르는 땀방울에 내 모습 얼룩지고 밤마다 별빛 따라 고향 하늘 바라보던 조국사랑” 리들리 한인 무연고 묘역 한 켠에 새겨진 문구다. 이름 없이 죽어간 인삼 장수들의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가 싶어 가슴 뭉클해진다. 지금 누가 이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에겐 아직 발굴해야 할 역사가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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