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과 BTS, ‘포스트 한류’의 새로운 길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9 14:00
  • 호수 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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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는 이제 그래미와 아카데미로 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감독상 그리고 최우수작품상까지 거머쥐며 4관왕을 차지하자 글로벌 흥행에도 파란불이 들어왔다. 아카데미 수상 결과가 나온 후 미국에서 《기생충》은 6억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며 박스오피스 순위를 12위에서 4위까지 끌어올렸다. 상영관도 대폭 늘어났다. 미국에서도 불고 있는 《기생충》 열풍에 대한 분석들도 쏟아져 나왔다. 《기생충》이 그려낸 한국 사회의 풍경이 양극화가 더 극심한 미국 대중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기생충》에 대한 열광은 영국에서도 똑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월7일 《기생충》은 첫 주말에 약 21억원의 수입을 올리며 영국 개봉 비(非)영어권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오프닝 성적을 거뒀다. 일본의 경우 한·일 관계 악화로 인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기생충》이 홍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방영됐지만 입소문을 타고 대중들을 끌어모아 ‘100만 관객’을 일찌감치 돌파했다. 여기에 아카데미 수상 프리미엄이 얹어지면서 일본 내에도 《기생충》 열풍에 불이 붙었다. 결국 일본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영화가 일본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른 건 2005년 《내 머릿속의 지우개》 이후 15년 만의 일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제92회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차지하며 미국 시장을 점령했다. ⓒAMPAS 제공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제92회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차지하며 미국 시장을 점령했다. ⓒAMPAS 제공

‘디지털 팬덤’에 올라탄 한류

《기생충》의 세계적 인기는 한국의 ‘반지하’나 ‘짜파구리’ 같은 독특한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고, 인터넷에 이른바 ‘《기생충》 놀이’를 유행시켰다. 영화 속 박소담이 부르던 이른바 ‘제시카송’을 부르는 외국인들의 영상이 올라오고 있고, 《기생충》의 포스터와 봉 감독의 면면을 패러디한 사진들도 SNS를 통해 급속도로 번져 나가고 있다. 자신의 취향과 기호가 맞으면 국적, 언어, 인종 등과 상관없이 호감을 드러내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열광적인 팬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카데미 4관왕의 쾌거에는 지금까지 잘 나타나지 않았던 이런 《기생충》만의 독특한 팬덤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기생충》의 이런 신드롬급 열풍의 흐름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이미 그 길을 먼저 갔던 방탄소년단(BTS)의 팬덤과 만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K팝 아이돌의 팬덤과 영화의 팬덤이 같을 수는 없다. 영화는 결국 결과물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것이고, 아이돌 팬덤은 아이돌에 대한 호감이 그 콘텐츠 소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양상은 달라도 이 팬덤이 SNS라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타고 순식간에 글로벌하게 번지고 있다는 사실과, SNS의 신(新)소비자로 등장한 밀레니얼 세대들의 감성과 맞아떨어져 폭발력을 내고 있다는 건 유사하다.

이들은 기성세대들이 구획해 놓았던 나라나 언어, 인종 같은 장벽들을 ‘꼰대들의 유물’이라 치부하며 뛰어넘는 짜릿함을 SNS를 통해 즐기고 있다. 그들은 ‘약자’로 치부됐던 문화적 아이콘이나 콘텐츠들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언더독 효과’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봉 감독이 “아카데미는 로컬”이라며 꼬집었던 대목은 그래서 ‘글로벌’이 유전자인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했다.

BTS가 글로벌 팬덤과 만나는 지점에서도 이러한 밀레니얼 세대들의 공감대가 발견된다. 같은 세대 청춘들이 겪는 고뇌와 방황 그리고 위로와 지지가 BTS 노래의 진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군가 규정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나’를 인정하는 삶을 노래함으로써 글로벌 대중들의 마음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국적이나 언어, 인종 같은 것들은 전혀 장벽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영어로 대변되는 지배적인 문화 코드에 대한 거부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러한 ‘로컬’ 개념의 기성관념을 뛰어넘는 ‘글로벌’ 지향의 팬덤으로 만들어졌다. 한류는 이제 이 디지털 팬덤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만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팬덤을 얻으며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방탄소년단(BTS)은 미국 시장을 넘어 글로벌 팬덤을 얻으며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한류 앞에 놓인 새로운 길

《겨울연가》로 촉발됐던 일본 한류와 《대장금》으로 이어지며 아시아와 중동까지 확장됐던 한류가 초창기 한류의 풍경이었다. 그 뒤를 이어 소녀시대와 빅뱅, 슈퍼주니어 등이 유럽은 물론이고 남미까지 확산시켰던 K팝 열풍이 두 번째 한류의 풍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미국이라는 대중문화의 최대 시장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싸이가 등장해 《강남스타일》로 한 차례 미국의 팝 시장을 휘저어 놓더니 방탄소년단의 글로벌 팬덤과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이 높디높던 미 본토의 문을 열었다.

한때는 멀게만 느껴졌고,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만 여겨졌던 미국 시장은 이제 성큼 한류의 새로운 무대로 등장했다. BTS가 낸 길로 K팝의 또 다른 아티스트들이 미국 시장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기생충》으로 인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 자체도 급증했다. 봉 감독의 《설국열차》와 《기생충》이 드라마화될 예정이라 이를 통한 한국 드라마의 글로벌한 관심 또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디지털을 바탕으로 탄생한 새로운 밀레니얼 세대 글로벌 팬덤은 이제 한류가 나아갈 새로운 지향점이 되고 있다. 이들의 특성은 뻔하지 않고 개성적이며 색다르면서도 완성도가 높다. 무엇보다 로컬에서 글로벌로 바뀌는 그 패러다임의 전복을 카타르시스로 원하는 콘텐츠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래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항상 그려 왔던 글로벌 보편성은 이들에게는 따분한 것이 되어 버린다. 오히려 색다른 로컬의 감성을 담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콘텐츠에 더 매료된다.

팝 시장에서 사라진 아이돌그룹의 그 부재를 완성도 높은 노래와 춤으로 채워놓은 K팝이 글로벌 팬덤의 마음을 흔들고, 《기생충》처럼 로컬의 색깔이 강하지만 양극화라는 글로벌한 시대적 양상을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담아낸 작품에 이들은 기꺼이 응원의 목소리를 더한다. 이제 한류는 미국 진출이니 유럽 진출이니 하는 단계를 벗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한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향후 글로벌 팬덤을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로컬들의 취향 전쟁이 한류의 격전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 한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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