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말하는 입에 마스크를 씌우자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2.29 16:00
  • 호수 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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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을 거절할 자유 ②

불가피하게 중국과 신천지, 대구가 정치적 쟁점이 돼 버린 한 주였다. 공포와 혐오가 이처럼 사이좋게 서로를 지지하며 한 시기의 핵심 감정이 된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간 신체가 이겨내거나 최악의 경우 공존할 수 있는 수준의 위험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어나를 것으로 간주된 특정 지역민이나 집단을 향하는 혐오와 배제의 수위는 오히려 위험성을 더해 간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한에서 코로나19로 인한 폐렴환자가 급증하던 지난달에 이미 유럽에서는 동양인 혐오가 무서운 수준으로 팽배했다. 그 혐오의 대상에 코리아가 등재되는 일도 이미 시작됐다. 나 개인으로 말하자면, 각종 혐오를 장사하는 일부 매체들을 향한 혐오의 감정이 마구마구 솟아나기도 한다. 내 안에서 빨간불이 웽웽거릴 만큼.

2월27일 대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진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2월27일 대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에서 의료진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혐오하던 이들에게 손 내밀 줄 알아야

코로나19 환자를 발본색원하고 바이러스가 침투할 만한 곳을 몽땅 틀어막는 일?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한 것이 혐오와 배제의 감정이며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현재 만연하기 시작한 혐오라는 질환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고 특별한 소수를 배제하는 일이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이 먼저 피해자가 된다. 소위 코호트 격리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뜻하는 바다. 혐오는 이미 우리 내부에 잠복해 있었고, 그것이 코로나19를 만나 마음껏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유행성이 강한 전염병은 단순히 질병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라는 것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등에 업고 너무 분명해졌다. 확진자들이 하필이면 대구 거점의 신천지교회를 중심으로 대량 확인되었다는 점도 정치적 사건의 성격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인간은 공동체의 안녕을 추구하고자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습관이 있다. 이정희의 《혐오 표현을 거절할 자유》에서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점은, 혐오 표현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혐오 표현은 인간 공동체 내부에 안전을 위해 배제해야 한다고 간주되는 소수집단을 만드는 중요한 도구다. 엄밀히 말하면 배제당하는 소수가 있어야만 체제의 안전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이다. 모두가 행복한 공동체를 위해 너희는 없어야겠다는 잔인함이다. 빨갱이 혐오로부터 직접 비롯한 종북 혐오가 통합진보당 해산에 오불관언하는 사람들을 합리화했다. 웹하드에 수많은 불법 동영상을 올리던 자들을 풀어주는 남성 연대의 강고함도 있다. 동성애 혐오로 정치적 이득을 착실히 챙기던 기독교도 있다. 이들의 횡포가 가능한 것은, 소수집단을 혐오해서 배제하는 것에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 주류사회의 탓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인간의 정치적 구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강자인 기독교계와 강자인 대구·경북을 무대로 자신을 드러내 버렸다. 나는 이 일이 대한민국의 국운이 아직 살아 있는 증거라고 미신적으로 말하고 싶다. 깨달을 기회다.

코로나19 사태는 모든 사람이 서로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힘내라대구경북 해시태그가 뜻하는 바다. 광주와 전북이 대구로 마스크와 의료진을 보내는 이유다. 혐오당해 본 사람들이 혐오하던 사람들을 향해 내미는 손을 제대로 잡을 줄 알아야 한다. 혐오를 내뱉던 입에는 마스크를 씌우고 서로 눈을 맞추어 대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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