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는 왜 외교관과 사랑에 빠졌나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07 12:00
  • 호수 1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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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 《피랍》 《교섭》 같은 시기에 제작 착수…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동시기에 몰리는 이유

왜 갑자기 외교관인가. 외교관이 충무로 핫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외교관 소재 영화 3편이 동시기에 제작되고 있는데, 그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가장 먼저 촬영에 돌입한 건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다. 당초 《탈출》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던 이 영화는 1990년대 소말리아 내전으로 고립된 남북 대사관 공관원들의 생사를 건 탈출을 그린다. 김윤석과 조인성이 처음으로 류승완호에 올라탔다. 모로코에서 촬영 예정인 《피랍》은 1986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발생한 외교관 납치 사건을 그린다. 《터널》의 김성훈 감독과 하정우가 다시 손을 맞잡은 가운데, 주지훈이 힘을 보탠다. 요르단으로 향하는 《교섭》은 중동 지역에서 납치된 한국인 인질들을 구하기 위한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의 사투를 담는다. 임순례 감독과 황정민이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다시 만나는 작품으로 현빈이 가세해 기대를 더한다. 제작 규모로 보나 캐스팅 면면으로 보나 세 영화의 대결은 ‘용호상박’ ‘용쟁호투’ ‘막상막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말이 통용되는 영화계지만, 소재가 비슷한 블록버스터 영화 세 편이 같은 시기에 기획된다면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같은 소재로 묶인 만큼 비교가 불가피할 텐데 “다들 괜찮겠어요?” 속내는 모르겠으나, 당사자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이거나 그런 척하는 분위기다. 소재는 같지만 다루는 방식과 작품 색깔이 확연히 다르다는 게 이유다. 또 하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뭐 그리 희귀한 일이라고. 그렇다. 동서양 극장가를 막론하고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동시기에 몰린 풍경은 자주 있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CJ 엔터테인먼트《나는 왕이로소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광해, 왕이 된 남자》 ⓒCJ 엔터테인먼트
《광해, 왕이 된 남자》 ⓒCJ 엔터테인먼트《나는 왕이로소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나는 왕이로소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비슷한 시기에 출몰한 비슷한 소재 영화들

대표적인 사례는 2012년 8월과 9월 각각 개봉한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광해, 왕이 된 남자》다. 주연배우의 1인 2역, 왕과 천민이 신분을 바꾼다는 설정 등 닮은 점이 많아 이목이 쏠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날 촬영을 끝낸 두 영화는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며 누가 ‘조선판 왕자와 거지’가 될 상인가를 두고 경쟁해야 했다. 만듦새는 확연히 달랐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이상적인 군주상을 제시하며 대중의 무의식에 있던 욕망을 건드렸다면,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전형적인 ‘장규성표 코미디’(《선생 김봉두》 《이장과 군수》 등을 만든 연출자)로 웃음에 집중했다.

두 작품의 경쟁은 2007년 일주일 차이를 두고 개봉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즐거운 인생》에 비하면 싱겁게 풀린 편이다. 중년 록밴드 이야기를 그린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즐거운 인생》은 소재뿐 아니라, 출연진 구성 등이 유사해 제작 초기 단계부터 날 선 신경전을 펼쳤다. 먼저 제작에 착수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즐거운 인생》 측에 유감을 표했는데, 연출을 맡은 박영훈 감독은 기자간담회에서 “비슷한 소재의 영화가 연이어 개봉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행”이라며 강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분위기는 《즐거운 인생》이 개봉 시기를 당초 예상보다 1주일 앞당기면서 더욱 험악해졌다. 이를 두고 ‘상도의에 어긋난다’는 의견과 아니라는 의견이 부딪쳤다.

2000년으로 시간을 돌리면 화마(火魔)를 소재로 한 《싸이렌》과 《리베라 메》가 있다. 할리우드 영화 《분노의 역류》 영향을 받은 듯한 두 편의 영화가 비슷한 시기에 출몰한 것이다. ‘누가 먼저 기획했는가’를 두고 “우리가 먼저!”를 외치던 두 영화는 ‘누가 먼저 극장에 간판을 거는가’를 두고도 첨예하게 대립했는데, 《싸이렌》이 2주 먼저 출격하며 ‘한국 최초의 파이어’라는 타이틀을 포스터에 달았다.

1999년 극장가엔 두 편의 짜장면 소재 영화가 일주일 간격으로 문을 열었다. 중국집을 배경으로 한 영화 《북경반점》과 《신장개업》이 ‘누구네 짜장면이 더 맛있나’를 두고 겨뤘다. 흥미롭게도 잡음은 작품 밖에서 일었다. 《북경반점》은 홍보를 위해 오뚜기와 손을 잡았는데, 오뚜기 브랜드 ‘짜장파티’ CF 속 음악이 《신장개업》 삽입곡 ‘운명의 짜장면’과 비슷하다고 해서 표절 논란이 일었던 것. 오뚜기까지 참전해 대리전 양상으로 번진 기이한 사례였다. 이 밖에 장례풍속이라는 이야기를 들고 1996년에 나온 《축제》와 《학생부군신위》, 2014년에 바둑을 소재로 흥행 수를 둔 《스톤》과 《신의 한 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 ⓒ CJ 엔터테인먼트영화 《즐거운 인생》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 ⓒ CJ 엔터테인먼트영화 《즐거운 인생》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즐거운 인생》 ⓒ CJ 엔터테인먼트

제작 과정과 사회 분위기가 영향 미쳐

그렇다면 앞에서 회수하지 않았던 질문. 왜 계속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이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가. 《싸이렌》과 《리베라 메》처럼 할리우드의 영화 장악력이 강할 땐, 국내 영화 기획이 할리우드 유행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었다. 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 아이템을 빠르게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비슷비슷한 작품이 비슷비슷한 시기에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한국 영화시장이 커지는 과정에선? 제작 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일단 모든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는 게 아니다. 제작사 등에 간택돼야 비로소 영화화 기회를 얻는데,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가 돌고 돈다. 시나리오보다 더 많이 도는 건 말과 소문이다. “이런 소재가 있다더라” “모 시나리오를 봤는데, 이야기는 별로라도 소재는 죽이더라”라는 소문이 퍼지면 아무리 희귀했던 아이템이라도 더 이상 희귀하지 않게 된다. 결국 창작이라는 게, 누가 먼저 그 소재를 자기화해 변형하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는 뜻이다.

어딘가에 초석이 된 시나리오가 있을지언정, 코로나19 역학조사를 하듯 그 기원을 명확히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정말 우연의 장난처럼 그렇게 된 사례도 없진 않지만. 충무로뿐 아니라, 할리우드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잊을 만하면 일어난다. 세기말의 분위기를 타고 1998년 혜성 출동을 소재로 한 두 영화가 등판했으니, 디즈니의 《아마겟돈》과 드림웍스의 《딥 임팩트》가 그 주인공이다. 사회 분위기나 동시대 대중의 관심사가 영화 소재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경우다.

그러나 이 분야 영화 대결의 최고봉은 1998년 2월 개봉한 드림웍스의 《개미》와 9월 나온 디즈니의 《벅스라이프》다. ‘《딥 임팩트》 vs 《아마겟돈》’에 이은 드림웍스와 디즈니의 대결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이 대결에 비상한 이목이 쏠린 건 《개미》를 이끌고 있는 이가 과거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최고 책임자였던 제프리 카젠버그였기 때문이다. 디즈니사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과 법적 분쟁까지 겪었던 카젠버그가 디즈니의 장기 프로젝트였던 벌레 소재를 들고나오자 아이디어 도용이라는 의혹이 일기도 했다. 단순한 작품 대결을 넘어 악연이 있는 두 기업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점에서 내내 이슈 몰이를 했다.

결과는? 카젠버그는 개봉일까지 앞으로 당기며 선점 효과를 노렸으나, 흥행에선 《벅스라이프》가 앞섰다. 《개미》와 《벅스라이프》의 사례에서 보듯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치고 나가느냐가 아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보여주듯 같은 소재의 영화라 할지라로 연출에 의해 분위기는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결국, 해답은 완성도와 재미다. 같은 재료라 할지라도 요리법에 따라 음식 맛이 천차만별이듯, 영화 역시 만드는 이들의 실력에 따라 결과는 갈린다. 물론 만드는 과정에서 편법이 쓰이지 않는다는 가정 안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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