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귀’ 비서관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4 18: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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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나는 흔히 말하는 ‘페이스북 죽돌이’다.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다 보니 저절로 페이스북에서 오래 논다. 페이스북의 장점이라면, 호흡이 길고 깊이 파고 들어가는 의견들을 만날 수 있는 거다. 내가 주로 찾아다니며 읽는 ‘페친(페이스북 팔로워)’들은 소수 정당 지지자들, 장애인권 운동가들, 연구자들, 출판편집자들 등이다. 대부분 페미니스트다. 이들이 내게 발견해 주고 들려주는 낮은 목소리들은 공통점이 있다. 주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절대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정부 시책을 향해 온갖 불평과 비판이 터져 나오는 한국이 참 괜찮은 나라라 느끼고 있다. 비록 ‘표현의 자유는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게 거짓 정보도 횡행하고 주장이 지나쳐 싸울 태세가 돼 있는 사람도 많지만, 피곤을 견디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정화된다. 그런 믿음이 있다. 이 나라는 어쩌면 아주 조금씩이나마 매일매일 혁명 중인 나라일지도 모르겠다. 밝은 면으로 보면 그렇다.

다만, 목소리 작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글 잘 못 쓰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불평을 하나. 남들이 주는 정보만 보고 “내 생각도 이렇겠지?”라고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하나. 애써 들어주려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또 어떡해야 하나. 목소리 크고 자기 이익에 골몰해 공익을 해치는 거대언론들은 어쩌나.

정말로 다르게 보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일이 많다. 가끔 우리는 ‘휠체어 하루 타기’ 이런 것을 해 보고는 ‘몰랐던 불편’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거기서 좀 더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일들은 어떻게 볼까. 예컨대 코로나19가 몰고 온 격리의 현장에서 고립되는 중증장애인들은 어떻게 살까. 확진자가 몇십 명 쏟아지는 콜센터를 폐쇄하면 그 사람들은 당장 뭘 먹고 사나. 경제활동을 잠시 멈춤 당하면서 생계가 막막해지는 사람들을 누군가는 절실하게 파악하고 있을까. 말이 좋아 ‘사회적 거리 두기’지만 그럴 수 없는 사업장은 또 얼마나 많은가. 동선 공개를 외치는 공포에 질린 사람들 뒤에 쫓기는 꼴이 되어 버리는 확진자들은 또 어떻게 보호하나.

3월11일 콜센터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확산 위험성을 호소했다. ⓒ연합뉴스
3월11일 콜센터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확산 위험성을 호소했다. ⓒ연합뉴스

서로 다른 국민 향해 귀를 열고 눈을 열어야

주류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다수를 이롭게 하기 위한 모든 일이 꼭 틀린 게 아닐지도 모른다. 천박한 공리주의가 가장 중요한 정치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지금,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되도록 많은 이가 도움을 받는 정치’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이럴 때 죽비를 꺼내 들자. 회칙 ‘새로운 사태, 일명 노동헌장’을 발표한 교황 레오 13세는 그러셨다. “가진 것 많은 이들은 교회와 국가가 안 도와줘도 알아서 자기를 챙길 능력이 있다. 그래서 교회는 정부보고 가난한(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하는 거”라고.

그런 뜻에서 청와대와 내각에 ‘듣는 귀’ 비서관이라는 직책이 생겼으면 좋겠다. 온갖 불평불만의 구덩이 속에서 정말 들어야 할 말들을 길어 올리는 직책. 늘 바라보는 그 국민 말고 다른 국민을 향해 귀를 열고 눈을 여는, 다른 국민뿐 아니라 다르게 보아야 바로 보이는 국민을 바라보는 눈을 지닌 그런 비서관. 젊고 패기 넘쳐서 지치지 않고 말의 바다를 헤엄치고, 다르게 듣고 보는 훈련이 돼 있어 침묵하는 말들을 듣는 그런 비서관. 팬데믹 시대에 대형 위기에 덮여 더 안 들릴 목소리들을 위하여. 멀리 영국에는 외로움 담당 장관도 생겼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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