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계 2000억 기부 약속 파기, 국토부는 뭐 했나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3.18 14: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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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초기 대국민 약속 이행 독려하더니…지금 와서 “업계 자발적 기부 약속” 발뺌

주요 건설사 72곳의 대표들은 2015년 8월19일 서울 논현동 건설회관에서 ‘건설업계 자정결의 및 사회공헌사업 선포식’을 가졌다. 정부가 8월15일 입찰 담합 건설업체 74곳에 특별사면을 단행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당시 건설업계는 담합 재발 방지와 함께 연내에 20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사회공헌활동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공사업 입찰 참가 제한이 풀리고 한 달여 만에 또다시 담합이 적발된 것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최근 5년간 담합 사건 조치 건수는 454건이다. 이 중 76%인 334건이 공공·민간 공사에서 발생했다.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2000억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연내에 조성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건설산업사회공헌재단에 따르면 지금까지 건설사들이 낸 돈은 106억2000만원에 그치고 있다. 매년 20억원 수준으로, 기금 조성을 약속한 지 5년여가 지났지만 실제 모금액은 5%에 불과했다. 사면 혜택은 누리면서 사회공헌 약속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업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담합에 따른 처벌 수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경실련 국책사업감시팀의 장성현 간사는 “지금까지 건설업계가 특별사면을 받은 것만 3번이다. 그때마다 자정을 밝혔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입찰 담합을 저지른 건설사들을 사면해 주는 관행 때문”이라며 “업계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담합 비리에 대한 입찰 참가 제한 조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토부에 대한 비난 여론도 확대되고 있다. 주요 건설업체의 약속 파기에 대해 국토교통부는 현재 “책임이 없다”고 강변한다. 건설업체의 자발적 기부 약속으로, 특별히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 없어 처벌할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모금을 맡은 건설산업사회공헌재단 역시 국토부 산하기관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국토부 건설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사면권은 당시 청와대에서 준 것이다. 2000억원 기부 약속 또한 건설업계가 자발적으로 한 것으로 국토부는 처벌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다”며 “지속적으로 공문을 보내 약속 이행을 종용하는 게 사실상 국토부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토로했다.

 

국토부 국장 재단 설립 때부터 이사로 참여

하지만 국토부는 건설정책국장이 이사로 참여하는 등 재단 설립 때부터 깊숙이 관여해 왔다. 심지어 재단 설립 초기에는 모금을 강력히 독려하기도 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안호영 의원이 과거 재단의 이사회 회의록과 건설사들의 내부자료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 재단은 2016년 6월21일 서울의 모 호텔에서 이사회를 열고 건설사별 기금 분담을 결정했다. 재단 이사회는 이날 워크아웃과 법정관리에 들어간 10개사를 제외한 64개 업체가 시공능력평가액에 따라 2000억원을 분담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국토부는 건설사들의 기금 모금을 강력히 압박했다. 당시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국토부 건설정책국장은 “건설업계의 어려운 현실에 공감하지만, 재단 설립 당시의 취지와 계획대로 기금 확보 등이 추진돼야 한다. 회사별 등급에 따른 (기금 납부) 이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환 전 국토교통부 1차관의 경우 모금 실적이 부실하자 대형건설사 CEO들을 불러 기금 출연을 독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이 재단이 한때 ‘제3의 미르재단’ 아니냐는 의혹이 일부 언론에 제기되기도 했다.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문화체육관광부가 개입한 것과 건설산업사회공헌재단과 국토부의 관계가 오버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국토부 측은 “대국민 약속 이행을 독력한 것은 사실이나 외압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런 국토부가 최근에는 입장을 완전히 바꿨다. 국토부 관계자는 “별도 계약서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금을 강제할 수 없다”거나 “도덕적 비판은 있을 수 있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건설업계가 법대로라면 불가능했던 11조원대의 공공 입찰에 참여하면서 경영 실적을 개선했지만, 2000억원대 기금 마련 약속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외면한 건설업계와 관리 책임을 외면하기 급급한 주무부처의 안이한 태도, 청와대의 보여주기식 정책 탓에 여기까지 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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