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사재기 정치’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23 09:00
  • 호수 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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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식품과 생필품으로 가득했던 대형마트의 진열대가 텅 비었다. 동네 식료품점에도 주민들이 몰려들어 계산을 하는 데만 30분 이상 걸린다.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미국의 최근 풍경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진정하라. 긴장을 풀라. 너무 많이 살 필요 없다”고 호소했을 정도로 미국을 휩쓴 사재기 열풍은 거칠고 거세다. 이탈리아 등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유럽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이어졌다.

이 모두가 우리로서는 낯선 광경들이다. 외신들마저 놀라움을 표시할 만큼 우리는 확진자가 속출한 대구·경북을 포함해 전국 어디에서도 큰 동요 없이 의연했다. 사재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돕겠다며 자신이 갖고 있는 물품을 지원하기에 바빴다. 그런 모습에 대해 미국 ABC 방송 기자는 대구 현지취재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공황 상태를 찾아볼 수 없다. 폭동도 없고 수많은 감염 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하는 데 반대하며 두려워하는 군중도 없다. 절제심 강한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우리는 모두 고요하게, 함께 손잡고 버텼다. 아프지만 울지 않았고, 나만 살겠다며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코로나19와 맞서 싸우면서도 의연했던 시민들과는 반대로 다른 곳에서 엉뚱한 사재기가 나타났다. 사재기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 자신의 안전을 담보해 줄 물품을 미리 확보하려는 행동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말해 ‘기회의 선점’이다. 이런 논리로 보면, 미래통합당에 이어 더불어민주당까지 뛰어든 비례대표 위성정당 만들기 또한 일종의 사재기 행위다. 다른 힘 약한 정당이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미리 빼앗아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군소 정당의 의석을 늘리려는 선거법 개정의 애초 취지는 완전히 와해됐다.

4월30일 오전1시쯤 패스트트랙 지정 직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항의의 표시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회의장 밖에서 드러누워 복도를 점거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2019년 4월30일 새벽 패스트트랙 지정 직후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항의의 표시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회의장 밖에서 드러누워 복도를 점거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선거법 개정안에 반발해 가장 먼저 위성정당을 만든 통합당도 잘못이지만, 뒤늦게 같은 꼼수를 선택한 민주당도 결코 떳떳할 수 없다. 비례대표 정당 창당을 그토록 격하게 비판하더니 이제 와서 똑같이 비겁한 모습을 보이느냐는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당사자들은 갖가지 시뮬레이션 결과물을 내보이며 이대로 가면 선거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컸다고 말하지만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스스로 강조해 왔던 정의를 스스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래 의석수를 계산기에 넣어 예측하는 행위도 불확실한 민심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보면 상당한 난센스다.

이제 총선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선거 열기를 말하기가 저어될 만큼 사회 분위기는 크게 침잠해 있다. 출마자 정보나 공약을 제대로 알기 힘들어 자칫하면 ‘깜깜이 선거’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 또한 강하다. 거기에 위성정당 논란까지 보태져 선거판이 왜곡·변질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 마스크 하나에 울고 웃으며 용케 견뎌온 날들에 정치가 희망을 비춰주진 못할망정 재를 뿌리지는 말아야 할 텐데, 선거 자체가 오히려 큰 걱정거리가 되어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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