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업계 ‘코로나 차별기부’…中엔 수억원, 韓엔 “…”
  • 공성윤 기자 (niceball@sisajournal.com)
  • 승인 2020.03.25 12:00
  • 호수 1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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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 이후 명품업체 대상 국내 기부 현황 조사...11개 브랜드 중 에르메스 1곳만 기부 사실 밝혀

일부 명품 브랜드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닥치자 명품다운 태도를 저버렸다. 한국 시장에서 수천억원의 돈을 벌어가면서도 기부에는 선을 그은 것이다. 법 개정으로 내년부턴 기부 내역이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여전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사저널은 주요 명품 업체 11곳을 대상으로 코로나 사태 이후 기부 현황을 조사했다. 그 대상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5곳(샤넬, 구찌, 프라다, 루이비통, 에르메스)과 2018년 국내 매출 1000억원 이상을 기록한 브랜드 6곳(롤렉스, 불가리, 페라가모, 입생로랑, 몽클레르, 보테가베네타) 등이다. 3월16일과 17일 양일간 각 브랜드의 국내 법인에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문의했다.

그 결과 기부를 했다고 밝힌 곳은 에르메스가 유일했다. 에르메스코리아 관계자는 “3월4일 기부했다”고 말했다. 이어 “기부 단체와 액수는 공개하기 곤란하다. 기부 사실을 홍보 수단으로 삼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불가리(불가리코리아)와 몽클레르(몽클레르신세계)는 “본사가 있는 이탈리아에 기부한 적 있다”고 했다. 단, 국내 기부 내역에 대해선 밝히지 않았다. 롤렉스(한국로렉스)는 “여건을 감안해 사회적 참여를 적절히 고려할 예정”이라고만 답했다. 그 외 나머지 7곳은 3월25일까지 “관계자에게 전달하겠다” “확인해 보고 연락 주겠다” 등의 말만 남기고 답을 주지 않았다.

3월17일 서울 송파구 한 쇼핑몰에 있는 명품숍 ⓒ시사저널 박정훈
3월17일 서울 송파구 한 쇼핑몰에 있는 명품숍 ⓒ시사저널 박정훈

11개 브랜드 중 에르메스만 기부사실 공개

일각에선 “기업에게 기부를 강요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물론 기업의 기부를 강제할 법적 근거는 없다. 다만 기부를 둘러싼 이중적 태도는 별개의 문제다. 명품 업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현지이자 세계 주요 명품 소비시장인 중국에선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루이비통과 불가리 등을 거느린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그룹은 코로나 사태 이후 1월 말 중국 적십자에 230만 달러(약 28억원)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구찌와 보테가베네타 등을 보유한 케링(Kering) 그룹도 같은 곳에 110만 달러(13억원) 기부를 약속했다. 에르메스는 중국 자선단체 쑹칭링기금회에 71만 달러(9억원)를 투척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럭셔리 화장품 브랜드 로레알과 에스티로더도 기부 행렬에 동참했다. 케링 그룹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기부 이유에 대해 “우리 생각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상처 입은 많은 사람들과 같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코로나로 상처 입은 사람들은 한국도 만만치 않다. 3월25일 오전 기준 국내 확진자 수(9137명)는 전 세계 8번째로 많다. 총 인구 대비 비율로 따지면 4번째다. 2월 말까지만 해도 한국 확진자 수는 전 세계에서 중국에 이어 2위였다.

명품 소비력도 상당한 수준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업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8년 한국 명품 시장 규모는 13조2900억원으로 나타났다. ‘쇼핑 천국’ 홍콩(9조6800억원)을 넘어 세계 8위다. 지난해에도 이 순위를 지켰다. 시장 성장률로 따지면 인도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4번째로 높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베인앤컴퍼니는 2018년 하반기 명품 시장 분석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 시장 규모가 390억 유로(53조7200억원)로 성장한 것은 한국 내 소비의 극적인 성장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루이비통이 지난해 4월 설립 이래 최초의 핸드백 팝업스토어(임시매장)를 국내에서 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남성의 소비력을 눈여겨본 구찌와 페라가모는 최근 국내에 남성용 매장을 따로 오픈했다. 명품 업계가 한국 시장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정작 국가적 위기에는 ‘짠물 기부’로 인색함을 드러낸 셈이다.

명품 업계의 기부 관행을 향한 질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명품 소비가 증가할 때부터 비판이 줄곧 따라다녔다. 루이비통코리아가 매출 1000억원을 처음으로 넘긴 지난 2006년, 그해 기부액은 고작 235만원이었다. 매출액의 0.001%였다. 다만 이때만 해도 일부 명품 브랜드의 기부금 등 경영정보를 확인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비판할 근거가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명품 업계가 국내 법인 형태를 공시의무가 없는 유한회사로 돌리면서 모든 정보가 감춰진 것이다.

루이비통코리아는 2012년 자사를 유한회사로 변경했다. 이후 구찌그룹코리아와 프라다코리아도 각각 2014년, 2016년 유한회사 전환하면서 지금까지 경영정보를 내놓지 않고 있다. 샤넬과 에르메스는 1990년대 국내 진출 때부터 유한회사로 설립했다.

이 같은 문제가 계속 지적되자 국회는 ‘외부감사법 개정안’을 2017년 통과시켰다. 그 골자는 경영실적 공시 대상을 유한회사로 넓히는 것이다. 매출과 자산 등이 일정 규모 이상인 웬만한 명품 업체는 여기에 포함된다. 금융위원회 공정시장과 관계자는 “개정 외부감사법이 유한회사에 대해 올해 사업연도부터 적용되면서 이번에 외부감사를 받고 내년에 감사보고서를 발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깜깜이 기부’…외감법 강화돼도 꼼수 있어

그래도 허점은 남아있다. 유한회사가 유한책임회사로 전환하면 또 공시 의무가 사라지는 것이다. 2011년 상법 개정으로 처음 도입된 유한책임회사는 유한회사와 마찬가지로 출자자들이 투자액 내에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단 유한책임회사는 투자 액수와 상관없이 사원 1명당 1개의 의결권을 지닌다는 특징이 있다.

명품 업체도 공시를 피하기 위해 유한책임회사 전환을 시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례도 있다. 옥션과 G마켓을 운영하는 이베이코리아는 지난해 12월 회사 형태를 주식회사에서 유한책임회사로 변경했다. 매출 9000억원대의 ‘공룡 기업’이 벤처기업에나 적합한 형태로 둔갑한 것이다. 일단 현행 상법상 유한회사에서 유한책임회사로 바로 전환할 수는 없다. 대신 중간에 주식회사를 거치면 되는데, 이 경우 6개월 내에 전환이 완료될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글로벌 패션전문지 WWD는 3월18일(현지시각) “코로나 사태로 명품관이 문을 닫고 패션쇼가 연기되는 등 패션 산업의 타격이 크다”고 보도했다. 반면 국내 명품 소비는 코로나 사태에도 당장 꺾이지 않았다. 신세계백화점의 2월 명품 매출은 전년 대비 16.4% 올랐다. 전 품목 통틀어 유일한 성장세다. 롯데백화점의 2월 매출도 대부분 품목이 하락세를 그린 가운데 해외패션(명품) 부문만 6% 증가했다. 특히 온라인 소비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명품 전문 인터넷 쇼핑몰 발란의 2월 거래액은 전년 대비 15배 늘었다. 이베이코리아의 쇼핑사이트 G9에선 2월14일부터 한 달 간 명품 매출이 전년 대비 46%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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