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의 비밀과 살로소돔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21 17:00
  • 호수 158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먼저 사람이 되자

텔레그램 n번방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살로소돔의 120일》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많은 이가 이름만 들어본 영화일 것이다. 사드 백작의 동명소설을 1944년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겨 만든 이 영화는 전쟁에서 패퇴한 파시스트 권력자들이 살로소돔성에 숨어들어 40명의 소년·소녀를 납치한 다음 저지르는 갖은 성학대와 유린을 통해 권력과 욕망의 적나라한 본성을 그렸다. 참혹한 내용과 지나치게 잔인한 표현 수위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금지됐다. n번방은 소돔성이라는 가상의 스튜디오를 사이버 대화방이라는 장소로 옮겼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비슷해서 전율이 인다.

n번방이란 이름처럼, 이런 대화방이 텔레그램 안에 수십 개인지 수만 개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 특히 ‘박사’의 검거 소식이 알려지자 사용자들 중 일부는 디스코드, 라인 등 다른 메신저로 이동해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갖은 아동 성학대의 악행이 전개되는 채팅방이라니, 그것도 몇십만 명이 가담한 범죄의 현장이라니, 차마 읽기도 끔찍한 이런 범죄를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반성 없이 저지르는 남자가 그토록 많다니. 이건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한 재앙 아닌가 모르겠다.

3월12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발본색원’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3월12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발본색원’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재앙적이고 충격적인 ‘텔레그램 n번방’

n번방을 취재한 국민일보 기사는 이 방의 사용자들을 26만 명의 ‘루저’들이라고 표현했다. 루저. 현실에서 낙오한 ‘약한’ 남성들이 자기보다 더 약한 어린 여성을 착취하는 일에 가학적 탐닉을 한다. 이들을 멈추게 할 방법은 좀 더 강하고 확실한 처벌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제대로 입법해야 하고 경찰과 검찰이 의지를 지니고 수사를 해야 하며 무엇보다 판사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가해자의 욕망과 태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쉽지 않다. 현재 그것이 잘 안 돼 이름이 회자되는 판사들도 있고, 여성들이 보기에 명백한 성폭력인 딥페이크(조작 동영상)를 예술적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국회의원도 있는 판이다. 아름다운 남성연대다.

그뿐이기만 할까. 국가라는 강력한 폭력으로만 이들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뿐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지배욕망과 권력욕망을 해소해야만 한다는 이 욕망의 노예들을 다 집어넣을 감옥은 있을까.

무엇보다 이들이 정말로 ‘루저’이기만 할까. 이들은 입장료로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의 돈을 지불할 수 있을 만큼 자금력이 있다. 들키면 갑자기 찌질이로 변신하지만, 자신들만의 살로소돔성인 n번방에서는 저 파시스트 잔당들처럼 권력을 마구 부리는 자들이다. 더 큰 돈과 권력이 있으면 더한 악행도 저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들이다. n이라는 수가 상징하는 것은, 이들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아무 남자들’이라는 것. 파졸리니가 충격적 방법으로 경고한 파시즘적 욕망의 눈먼 질주가 분명히 우리 사회의 한복판으로 밀려와 있음의 증거다. 비록 이들 파시스트에게 복무하는 생물학적 ‘여성’이 있다 할지라도 이 구조는 여성과 아동을 착취하는 것이 승자의 표지라는 악의 문화 위에 있다.

삶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반성하라는 자연의 복수처럼 코로나19가 몰아치고 있다. 충족되지 않는 쾌락을 충족하고자 악을 저지르는 일에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 대신 인간으로서 지니는 연대와 배려의 온기를 회복하라는 경고다. 먼저 사람이 되자.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