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헌 한국예총 회장 “복지 사각지대 예술인 지원 시급”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20.04.02 14:00
  • 호수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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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범헌 한국예총 회장 “예총 조직도 수평적 구조로 구조조정할 계획”

코로나19 사태로 한국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끝 모를 주가 하락으로 금융시장은 사실상 마비됐다. 해외 수출길이 막히면서 기업도 비상이다.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이 0%대에 이를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문화예술계도 마찬가지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예총)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로 취소되거나 연기된 행사가 전국적으로 2500건 이상이다. 피해액만 500억원대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의 특성상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서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이 정부의 긴급 지원을 받는 사이 문화예술인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범헌 한국예총 회장이 지난 2월 취임 이후 예술인의 복지 증진과 함께 한국예총의 개혁에 고삐를 당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예술인의 삶에 대한 보장이 없으면 국민이 문화 향유권을 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술인 복지가 곧 국민 복지인 것”이라면서 “지금까지 열악했던 문화예술계의 창작 환경을 바꾸기 위해 한국예총도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니온 형식의 협동조합이나 노조를 만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지난해 구직수당만 9조원 가까이 지급됐지만 문화예술인들은 이 지원정책에서 배제돼 있었다”면서 “장르나 지역 단위로 예술인 조합을 결성한 후 회원들을 모두 가입시킬 계획이다. 이 경우 예술인들의 4대 보험 가입이나 실업수당 지급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지난 3월23일 서울 목동에 위치한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시사저널 임준선
이범헌 한국예총 회장 ⓒ시사저널 임준선

문화예술인들에게 4대 보험 가입이나 실업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구상이 생소하다.

“정부의 사회안전망 확충 정책으로 지난해에만 고용보험 가입자가 51만 명이나 늘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으로 고용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지난해 구직수당만 9조원 가까이 지급됐지만 문화예술인들은 정부의 지원정책에서 배제돼 있었던 게 현실이다. 현행법상 예술가의 위치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의 특성상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서류도 없다. 자율시장 논리만 적용하다 보니 창작물에 대한 가치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르별, 지역별로 유니온 형식의 예술인 조합이나 노조를 만들 예정이다. 한국예총의 회원들이 모두 가입하면 4대 보험 가입이나 실업수당 지급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창작예술을 전제로 예술가에게 노동의 가치를 부여하는 조치다. 이를 위해 최근 한국노총 등과도 MOU(양해각서)를 맺었다. 기존의 양대 노총이 아니라 별도의 예술인 노조를 준비 중이다.”

노동자라는 표현에 대해 기존 문화예술가들이 반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젊은 예술인들은 스스로 문화예술 노동자라고 부른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다르다. 미술 노동자라는 호칭에 불편해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가 제도권으로 들어가고, 제도적인 지원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라는 표현이 불가피하다. 직업적으로 예술가에 대한 정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들이 노동자로 인정되면 또 어떤 이점이 있나.

“문화예술인이 노동자로 인정받게 되면 예술창작 행위가 노동으로 인정된다. 그러면 성과물인 미술품이나 공연, 전시나 저작물도 법적 재화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예술품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세금 대신으로 내는 일도 순차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일례로 국세청은 현재 조세물납제를 운영 중이다. 부동산이나 동산으로 세금을 대신하는 방식인데, 동산의 경우 금과 다이아몬드, 채권, 주식 등 4가지로 한정돼 있다. 유럽 등 선진국의 상황은 다르다. 미술품으로 세금을 대신 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작품의 가격 평가를 위한 감정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물납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 세무 당국도 이 조세물납제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전문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그때그때 미술품 가격이나 진위 여부를 감정하면 이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결국 문화예술인들의 권리 증진이 국민의 문화 향유권 충족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인데.

“그렇다. 창작하기 좋은 환경에서 양질의 작품이 생산되고, 그 작품을 향유하면서 국민 삶의 질도 높아지게 된다. 열악한 문화예술계의 창작 환경을 바꾸는 것이 곧 국민들의 예술 복지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현실은 반대였다. 2020년 우리나라의 정부 예산은 500조원을 넘어섰다. 연간 예산 증가율도 9% 수준이지만 문화예술 분야의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예총의 힘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예총 내부 시스템에 대한 개혁 목소리도 적지 않다.

“맞는 말이다. 한국예총의 회원만 130만 명이다. 하지만 한국예총은 그동안 중앙 중심으로만 운영됐다. 지회나 지부뿐 아니라 소속 회원들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 그 결과 조직이나 단체의 힘을 결집시키지 못했고 문화예술계의 현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한국예총 역시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 회장의 권한부터 대폭 분산시킬 생각이다. 중요한 결정은 한국예총 모든 회원의 뜻이 모아질 수 있도록 ‘예총 전국 회의’를 조만간 신설할 예정이다. 모바일 세상에 맞게 밴드나 카톡, 텔레그램 등 SNS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전국 회원들의 DB를 구축해 중요한 사항은 스마트폰을 통해 소속 회원들에게 직접 알리는 ‘스마트 예총 시스템’도 구축할 계획이다. 스마트 예총 시스템의 경우 현재 용역 발주를 준비 중이다. 이 시스템을 통해 정부 지원사업도 회원들과 공유할 계획이다. 시스템 구축이 끝나면 정부의 각종 공모사업에 기존 회원들이 차별받지 않고 응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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