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장’ 투기판 된 라임 사태…금융게이트로 비화하나
  • 송창섭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20.03.30 10:00
  • 호수 1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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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식 없는 투기자본 돈놀이에 정·관계 인사들 비호 나서

“이건 ‘게이트’(문) 문제가 아니다. ‘헬’(지옥)이 열렸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만난 한 증권사 구조화상품담당 임원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최근에야 라임 사태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국내 금융자본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금융 당국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번 라임 사태는 전형적인 ‘투기판’이다. 탐욕에 눈이 먼 금융자본이 ‘돈 내고 돈 먹기 식’의 투기판을 깔았고, 그 과정에서 금융 당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관리·감독에 소홀한 채 거의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일부 언론에 청와대에서 근무한 전직 행정관 K씨와 정치권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자칫 권력형 비리로 비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1조6000억원 규모의 펀드 환매가 중단되면서 촉발된 이른바 라임 사태는 급하게 토종 사모펀드 육성에 매달린 정부의 금융산업 정책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관리·감독에 충실해야 할 금융 당국의 역할이 논란거리다.

조국 전 법무장관의 친인척이 운영한 모 사모펀드가 투자금을 맘대로 빼낸 것이 토종 사모펀드 시장의 심각성을 알린 단초가 됐다면, 이번 라임 사태는 관련 산업의 뿌리마저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조국 사태와 라임 사태는 투기자본이 사모펀드라는 베일에 싸인 금융 시스템을 악용해 감독 당국의 눈과 귀를 가린 상태에서 돈놀이를 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각 사모펀드가 코스닥 기업들의 M&A(인수합병) 도구로 활용됐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여기에 정권 실력자들이 모종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장 교란을 부추겼다는 것도 공통점으로 지적받는다.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가 2019년 10월14일 서울 여의도 IFC에서 열린 펀드 환매 연기 관련 기자간담회에 앞서 기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가 2019년 10월14일 서울 여의도 IFC에서 열린 펀드 환매 연기 관련 기자간담회에 앞서 기자들에게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투기자본이 코스닥 등 금융시장 교란해 피해 심각

그동안 라임 사태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각 주체마다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다. 무엇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수원여객 사건만 해도 투기세력은 회사의 A지분을 317억원, B지분을 293억원에 사들여 C업체에 750억원에 되팔 계획을 꾸몄다. 그 과정에서 회사를 중개한 업체는 중간 이득만 140억원을 챙기는 구조를 짰다. 이처럼 워낙 복잡하게 구조화돼 있다 보니 일반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번 라임 사태는 서울 강남 등 일부 지역에 거주하는 고소득 투자자들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서민층의 피해가 적어 일찍부터 부각되진 않았지만, 고소득층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을 이명박 정부 때 터진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 이후 발생한 또 다른 거대 금융 게이트로 보고 있다.

“라임요? 돈 되는 거라면 영역을 가리지 않고 마구 벌여 업계에선 그동안 말이 많았어요. 돈 버는 거라면 뭐든지 한다는 게 사모펀드라고 하지만, 그 정도가 차원이 달랐지요.” 한 대형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그러면서 “현재 수배 중인 이종필 라임 부사장은 마당발처럼 활동해 주변에서 ‘저 양반 언젠가 한번 사고 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수사 당국은 이 부사장 등 이번 사태에 연루된 관계자들의 신병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라임 사태의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올라온 것은 최근 이 펀드를 판매한 장아무개 전 대신증권 센터장과 펀드 피해자가 나눈 대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다. 녹취록에서 장 센터장은 피해자에게 청와대 관계자의 명함을 보여준다. “사실 라임 거요, 이분이 다 막았었어요. (청와대 고위 간부) ○○○한테까지 가서. 우리은행 내부 문건 기사에서 보셨죠? 그거 여기에 들어가는 거였어요, ○○○한테.”

청와대 경제수석실에 근무한 행정관 K씨는 금융감독원 출신으로 당시 청와대에 파견 나가 있었다. K씨와 라임자산운용의 연결고리로, 여러 언론 보도를 통해 라임의 전주(錢主)로 알려진 김아무개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존재가 알려지면서다. 이 역시 증권사 장 센터장의 대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파장이 일었다. 녹취록에서 장 센터장은 ‘회장님’(김 전 회장)으로 지칭하는 한 큰손이 재향군인회 상조회를 인수한 뒤 라임의 정상화 자금으로 활용할 거라며 피해자를 안심시켰다. “재향군인회 상조회가 공개 입찰로 나왔어요. 상조회에서 (예치한) 회원비로 1800억원이 있어요. (인수하면) 이걸 쓸 수가 있어요. 투자를 할 수가 있어요.”

전직 청와대 행정관과 펀드사 임원 친분으로 엮여

현재 언론에선 또 전 수원여객 재무이사 김아무개씨를 김 회장과 공범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대신증권의 장 센터장과 전직 청와대 행정관 K씨, 라임자산운용 관계자들은 고향, 고등학교 동문으로 엮여 있다.

여권 정치인 출신이 뒤를 봐줬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 부산 친노(친노무현계)의 핵심 관계자인 이아무개씨의 이름도 거명됐다. 이 사람은 전문건설공제조합 상임감사에 임명되면서 보은인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수사 당국은 이번 사태가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며 조용히 내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지난 2월 라임 수사팀에 서울중앙지검 검사 3명과 서울동부지검 검사 1명을 서울남부지검에 파견하도록 지시한 데 이어 최근 검사 2명을 추가로 합류시켰다. 현재 검찰은 검사 11명으로 수사팀을 꾸려 관련 수사에 나선 상태다. 경찰도 특수수사부서를 중심으로 강도 높게 내사 중이다. 수사 당국은 우선 달아난 증권사 장 센터장과 김 회장, 이종필 라임 부사장 등에 대한 신병 확보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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