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해법, 국제사회 외교전으로 풀어야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3.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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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9화 - ‘역사의 냉대’ 받은 강제동원의 기억

코로나19 사태로 한·일 양국의 교류가 차단된 가운데 강제동원 문제가 두 나라 갈등의 시한폭탄으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 전범 기업의 한국내 자산에 대해 강제 매각집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로 불거진 한·일 갈등은 일본의 경제 보복과 이에 따른 한국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 사태까지 터지자 두 나라는 똑같이 입국 금지에 버금가는 초강수를 던졌다. 극단으로 치닫는 한·일간 악순환은 8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강제동원 잔혹사’에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이다. 잊혀진 역사의 갈피에서 그 참혹한 기억을 되살려 우리 앞에 소환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제동원은 일제 강점기 전시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또한 청장년층부터 여성·어린아이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노무동원·병력동원·성(性)동원 형태로 이뤄졌다. 지역적으로도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 사할린에서 남양군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강제동원이 워낙 전방위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그동안 피해 규모는 고사하고 용어·대상·성격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 때로 일제의 왜곡된 통계나 조사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도 했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 이영훈은 강제동원을 “국제자유노동시장의 흐름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규정하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서슬 퍼런 식민지 전시 체제 하에서 일어난 강압 행위를 ‘자유로운 해외 파견 근로’로 둔갑시킨 것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한·일 갈등 속에 소환된 식민지 강제동원의 잊혀진 기억

강제동원 피해 조사는 해방 60년이 지난 2005년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겨우 그 첫발을 디뎠다. 기록에 의하면 국외로 강제 동원된 인원은 대략 2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징용자는 탄광·군수공장·제철소 등에 배치되어 가혹한 근로 조건 아래에서 혹사당했고, 심지어 집단 학살된 사례도 있었다. 중국 하이난 섬의 ‘천인갱(千人坑)’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이 사건은 종전 직후 일제가 조선인 강제징용자 1000여 명을 집단 학살해 매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로 끌려간 징용자들은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이역만리에서 무참히 쓰러졌던 것이다.  

경북 경산시 남산면에 위치한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와 천인갱 유골함. 가운데는 강제 징용자 모습
경북 경산시 남산면에 위치한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와 천인갱 유골함. 가운데는 강제 징용자 모습

강제징용에 대한 저항도 거셌다. 1944년 7월 경북 경산에서 29명의 청년들이 항일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했다. 대부분 징용대상자인 소작농이었다. 극심한 전시 수탈을 겪는 데다 징용자로 끌려가게 되자 이들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대원들은 인근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무장한 일경 30여 명을 상대로 죽창과 투석전으로 맞섰다. 약 20일간의 무력 투쟁 끝에 가담자 전원이 체포되었고 두 명은 형무소에서 삶을 마감했다. 당시 일경은 ‘대왕산 죽창의거’를 “연극처럼 꾸민 티가 나는 아이들 장난”이라며 사건 축소에 급급했지만, 본국 제국의회에 보고될 정도로 파장이 컸다. 행여 전시 인력동원 전략에 차질을 빚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제동원은 1938년 ‘국민총동원법’에 따라 시행된 반면, 나치 독일은 헤르만 괴링이 입안한 ‘경제 4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노동력 확보 정책을 펼쳤다. 앞서 1930년에 국제노동기구(ILO)가 강제노동을 폐지했지만 일본과 독일 두 나라는 이 협약을 무시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점령지 내에서 현지인 노동자와 전쟁 포로들을 생산 현장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실행 책임자인 프리츠 자우켈(1894~1946)은 하급 선원 출신으로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을 발휘해 권력 핵심에 오른 인물이었다. 1942년 3월 전권 노동감독관에 임명된 그는 2년 만에 무려 750만 명의 징용자를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단기간에 사상 최대 규모로 인력을 동원하다 보니 살인적인 노동량, 임금 착취 등 각종 비인도적인 행위가 끊이질 않았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정은 자우켈에게 “효과적인 강제징용을 위해 폭력적·조직적 인권 유린을 자행한 죄”를 물어 교수형에 처했다.

프리츠 자우켈과 독일로 이송되는 소련 노동자들
프리츠 자우켈과 독일로 이송되는 소련 노동자들

흥미로운 사실은 강제징용자 가운데 아시아 식민지인들이 포함된 점이다. 1939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만9000여 명의 베트남인과 일부 캄보디아인들이 식민종주국인 프랑스 마르세유행 배에 올랐다. 자원자는10%에 불과했다. 이들은 6곳 수용소로 나뉘어졌는데, 1940년 나치의 괴뢰인 비시정권이 들어서자 독일군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프랑스가 아닌 나치 독일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이다. 주로 독일군 요새 건설이나 무기 생산 작업에 동원된 이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의 비숙련 노동자였다. 게다가 프랑스말도 알지 못했고, 임금은 프랑스인의 10분의 1에 불과해 ‘개나 고양이보다 못한 야만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들은 더욱 열악한 처지에 놓여 1943년과 1944년에는 사망자 비율이 20%에 근접할 정도였다. 불만이 극에 달한 노동자들은 점차 정치 투쟁에 눈을 돌렸다.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에 뛰어들거나 베트남 독립세력과 연계해 항불 투사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의 파업 대열에 앞장서기도 했다. 식민 본국을 위해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어느 틈엔가 ‘불순 세력’으로 탈바꿈하게 된 꼴이었다. 결국 극렬분자 수백 명이 체포되는 사태에 이르자 전후 프랑스 정부는 이들을 강제 추방하게 되었고, 이 작업은 1952년에 가서야 마무리되었다.

베트남 노동자 사례는 우리 강제동원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인도네시아 등지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감시원들도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해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고 양칠성 같은 이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 싸웠다. 또 그중 백 수십 명은 일본인 전범으로 몰려 처형되거나 수감되는 기구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여기에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혀 다른 체제에 동원된 일도 베트남 징용자와 닮은꼴이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 징용자들은 종전 무렵 이곳에 진주한 소련군에 억류되어 국가재건 노동에 동원되었다. 식민지 황국신민으로 갔다가 난데없이 소련의 노동 인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소련·남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이들은 냉전 체제가 무너진 뒤에야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남방 정글에서 쓰러져 간 포로 감시원들이나 50년 만에 유골이 되어 귀향한 사할린 동포들 모두 ‘나라 잃은 땅에서 태어난 죄’로 전세계 유례없는 강제동원 잔혹사를 써내려 갔던 것이다.

프랑스 군수공장의 베트남 징용 노동자. 오른쪽은 사할린 징용자 유해 봉환과 2007년 코르사코프 항구에 세워진 조선인 징용자 위령탑

일제와 나치 독일의 강제동원은 똑같이 국가 권력이 개입한 조직적인 전쟁 범죄로 드러났지만 이후 진행된 책임과 배상 과정은 달랐다. 독일은 정부와 기업이 절반씩 낸 100억 마르크의 기금으로 ‘기억·미래·책임 재단’을 설립해서 피해를 보상해 왔다. 반면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보상 책임이 소멸됐다”는 말만 되뇌고 있을 뿐이다. 우리 대법원의 “일본 기업의 피해자 1인당 1억원 위자료 배상” 판결 후 1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와 기업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남은 건 압류한 전범 기업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는 조치다. 그 집행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아베 정권은 “강제 매각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한·일 관계에 또 한 차례 격랑을 예고하고 있다.

 

이제라도 국제 사회에 외교전 적극 펼쳐 꽉막힌 ‘강제동원 해법’ 풀어내야

사실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같은 과거사 청산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정치와 외교로 풀어야 할 영역에 가깝다. 한일 협정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됐다던 일본이 왜 다시 위안부 협상에 나섰겠는가. 국제 여론에 등 떠밀려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이다. 독일이 강제동원 보상을 선언한 일도 유대인 피해자들이 미국 정부를 통해 압력을 행사한 탓이었다. 돌이켜 보면 2012년 대법원의 첫 강제동원 판결 이후 6년 동안 뒷짐만 쥐고 차일피일 미뤄 온 우리 정부의 책임도 크다. 늦었지만 국제 여론전 등 외교적 노력에 적극 나서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한다. 이제 ‘역사의 냉대’ 받은 이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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